느린 만큼 보인다. 전북 부안 변산반도는 안도 밖도 볼거리로 꽉 차있다. 100여 개 봉우리로 둘러싸인 지역은 내변산, 3면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해안지역은 외변산으로 구분한다. 보통은 변산에서 가장 이름난 격포항과 채석강으로 내달리기 일쑤다. 내비게이션에만 의존하면 부안IC에서 30번 국도로 안내한다. 부안과 격포 사이 도로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4차선으로 확장했기 때문에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반면 빠른 만큼 놓치는 게 많다. 좀 느리지만 내변산을 관통하는 736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변산반도의 알짜배기 풍경을 두루 즐길 수 있다. 느릿느릿 차를 몰아 봄빛이 눈부신 부안의 산과 바다로 떠나보자.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아기자기한 내변산
변두리 산 변산반도의 봉우리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가장 높은 의상봉이 508m이다)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아기자기한 풍경을 골짜기마다 숨겨놓았다. 고려 말기 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남행월일기에서 ‘변산은 예부터 천부(天府)로 일컫는다’고 적었다. 그만큼 산천이 좋고 물산이 풍부해 하늘이 준 보물창고라는 뜻이다.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제수된 그의 주요 임무는 변산의 목재를 관리하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도 변산 소나무는 개경의 궁궐을 짓는데 중요한 목재였던 모양이다.
변산 드라이브의 시작은 하서면 도화사거리다. 우슬재를 한 구비 돌면 오른편으로 병풍처럼 두른 바위 능선이 펼쳐진다. 눈대중만으로도 200~300m 길이에 높이가 수십 미터다. 왕이 머물렀던 곳이라 어수대라 부른다. 어느 왕인지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임금님도 쉬어갈 만한 풍경이라는 비유겠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탐방로를 따라 올라볼 수도 있지만, 이런 풍경은 아래서 전체를 보는 것만 못하다(게으른 여행자의 핑계). 비가 많이 오면 바위절벽에서 치마자락처럼 쏟아지는 폭포수가 또한 장관이라니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좋겠다.
꽃잎 날리고 연초록 새순이 오르는 산 빛 따라 달리다 깊은 산중에서 뜬금없이 교량을 만난다. 중계교 아래 부안댐 물빛이 초록이다. 내변산 100여 개 봉우리에서 흘러드는 백천내 물줄기는 모두 부안댐에 모인다. 댐 수계에는 민가가 없어 부안 사람들은 스스로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수돗물을 먹는다고 자랑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으로 국립공원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 닿는다. 아무리 드라이브 여행이라도 이곳에서 직소폭포는 꼭 다녀와야 내변산에 온 보람이 있다. 눈길 가는 곳마다 호젓한 숲과 계곡, 호수와 폭포가 어우러진 내변산의 아름다움만 한데 모았다. 왕복 4.4km로 2시간이면 충분하다. 폭포 전망대를 앞두고 두어 차례 짧은 경사를 빼면 대체로 순탄하다.
등산로는 부안댐 상류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물줄기가 한없이 맑고 푸르다. 너무나 투명해 물고기의 움직임이 왜곡 없이 전달된다. 계곡물을 한 움큼 뜨면 몇 마리는 저절로 걸릴 듯 ‘물 반 고기 반’이다. 맑고 차가운 모래와 자갈 바닥에 서식하기 때문에 볼 수는 없지만 이곳은 미꾸리과 부안종개 서식지다. 이곳에만 있기 때문에 부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직소폭포를 약 1km 앞두고 에메랄드 빛 호수 직소보를 만난다. 부안댐이 건설되기 전까지 부안의 상수원이었다. 높고 낮은 산자락이 아담하게 감싸고 있는 물빛이 풍덩 빠지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다. 호수 전망대는 얼핏 하트모양이지만 실제는 내변산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미선나무 열매를 형상화했다. 미선나무도 한국에만 서식하는 희귀종이다. 호수를 지나 한 구비 돌면 계곡 물소리와 폭포소리가 일순간 정적을 깨트린다.
30m 높이에서 한줄기로 떨어지는 직소폭포는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변산을 꼭 닮았다. 폭포수가 직하하는 짙푸른 물웅덩이는 가장자리로 갈수록 투명해지는가 싶다가 곧바로 2~3개의 작은 소(沼)를 이루며 떨어진다.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따로 있는데도 자꾸만 가까이 가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상수원이자 국립공원 지역으로 묶여있어 시원하게 발 한번 담그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직소폭포로 가는 등산로 중간지점에 신라고찰 월명암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2km거리다. 거리로만 치면 능선 맞은편 남여치통제소에서 오르는 게 조금 짧다. 그러나 드라이브 여행 코스로는 무리다. 쌍선봉(459m) 8부 능선쯤에 자리잡고 있어 경사가 가파르고 쉽게 다녀올만한 코스는 아니다. 쌍선봉은 서해낙조 조망으로 유명하고 월명암은 ‘월명무애(月明霧靄)’라고 부를 만큼 새벽 안개가 장관이라니 다른 기회를 노려봐야겠다.
넉넉한 갯벌에 질펀한 삶이 녹아있는 외변산
구비구비 내변산을 벗어나 변산면소재지를 지나면 가장 먼저 만나는 바다가 고사포해수욕장이다. 안내책자는 1km에 가까운 솔숲을 자랑거리로 치는데 얇게 퍼져 끝없이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넋을 빼놓는다. 뭘 좀 아는 관광객은 이곳에 올 때 들통과 삽을 준비한다. 간조 때면 백사장과 이어진 넓은 갯벌에서 숨구멍을 찾아 조개를 캐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진짜 갯벌은 해수욕장 왼편으로 보이는 하섬 부근이다. 바지락은 기본이고 해방조개 동죽 가리비 등 다양한 조개와 주꾸미 낙지까지 ‘부안의 찬장’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곳이다. 섬이 코앞에 보이는 도로 옆에 전망대가 있다. 드넓은 갯벌로 얇게 퍼지는 파도가 빚어내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한데, 욕심을 내는 여행객이 있는 모양이다. 어민들에겐 삶의 터전인 만큼 험악한 ‘경고’ 표시가 아니라도 이곳 갯벌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기본이겠다. 매월 음력 보름과 초하루를 전후한 3~4일간은 육지와 섬이 연결되는 장관을 볼 수도 있다.
하섬 전망대에서 해안을 따라 돌면 적벽강과 채석강을 잇달아 만난다. 둘 다 강(江)과는 관계없다. 소식과 이태백이 즐겨 찾았다는 중국의 그곳과 닮은 데서 따온 이름이다. 화강암과 편마암 퇴적층이 수 만권의 책을 쌓아 올린 것처럼 바다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 해안절벽을 이뤘다. 규모로는 채석강이 뛰어나지만 한적함을 택한다면 적벽강이 제격이다. 적벽강 언덕 끝자락엔 조그마한 당집이 자리잡고 있다. 사나운 서해 물길을 다스리는 개양할머니와 여덟 딸을 모신 수성대(水聖臺)다. 매년 정월 어민들은 이곳에서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무속신앙인들에게는 영험하기로 소문나 굿도 자주 열린다(물론 마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운이 좋으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바닷가 언덕에서 펼쳐지는 굿판을 구경할 수도 있다.
채석강은 격포해수욕장과 격포항 사이에 있다. 해수욕장 쪽은 바다에서 언덕까지 넓고 높은 퇴적층이 보기 좋고, 항구 쪽에는 해식동굴이 발달해 있다. 따로 산책로를 만들 수 없어 울퉁불퉁한 바위를 걸어야 하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채석강에서 줄포방향으로 해안 도로를 따라 7km만 더 가면 시심을 자극한 자그마한 항구가 나온다.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안도현 시인의 ‘모항으로 가는 길’ 한 구절이다. 모항에 비하면 격포도 채석강도 촌스럽다 했으니 이보다 강력한 추천사가 있을까?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씹는 맛이제’(2003, 디새집)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도 농사짓고 사는 농부시인 박형진의 산문집 제목이다. ‘가난한 농사꾼의 시심으로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애절하고 익살스럽고 고소한’(출판사 서평) 부안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모항을 대표 지명으로 올렸다.
모항은 잘록한 허리를 가운데 두고 한쪽은 포구이고, 맞은편은 해수욕장이다. 해변이라야200m 남짓이니 번잡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해수욕장과 포구 사이 솔숲도 빽빽하지 않아 오히려 안정감 있다. 줄포 방향으로 달리다 언덕길에서 보는 모항의 풍경 또한 일품이다. 요즘은 저녁 해가 오른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겨울철이면 항구 위쪽 형제섬으로 떨어지는 일몰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다시 차를 몰아 석포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내소사다. 입구에서 사찰에 이르는 400여m 전나무 숲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것은 수령이 1000년 가까운 느티나무다. 전나무 숲 입구와 경내에 각각 한 그루씩이다. 새끼줄을 두르고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당산목의 지위도 여전하다. 민간신앙까지 두루 껴안은 불교의 포용성을 보여준다. 대웅보전 후불 벽화에도 민간신앙의 흔적이 남아있다. 흰옷을 걸치고 있는 관세음보살좌상은 다른 곳에는 없는 모습이다. 내소사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대웅보전의 꽃무늬 문살이다. 미술에 문외한이라도 누구나 한번쯤 눈여겨보게 된다. 위로 갈수록 봉우리가 활짝 피는 모양의 꽃문살은 특유의 나무 결까지 살아있어 섬세하고 화려하면서도 기품과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의 큰 기둥 한쌍은 내내 눈에 거슬린다. 내소사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대형 영산회괘불화(靈山會掛佛畵)인데 일년에 딱 한번 초파일 무렵 열리는 영산재 때 그림을 내걸기 위해 세운 것이라니, 넘치는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는 게 이런 경우 아닐까. 낮게 걸린 연등이 뒷산 관음봉은 물론 주위 경관을 답답하게 막고 있는 점도 아쉽다.
내소사를 나와 조금만 가면 곰소다. 젓갈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 제철이 따로 없다. 곰소항 뒤편엔 곰소염전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다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소금은 아직은 이르고 5월은 돼야 생산한다. 특히 5월과 6월에 나는 소금엔 변산 소나무의 송화가 섞여 색이 노랗고 값도 더 받는다.
이 정도 일정이면 걷고 쉬는 시간까지 보태 하루를 꽉 채운다. 저녁 무렵이면 오던 길을 되돌아 전북해양학생수련원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솔섬이다. 수련원 앞 해안에서 떨어질 듯 이어진 자그만 섬이다. 바위섬 꼭대기에는 미술시간에 누구나 한번쯤 그려봤을 전형적인 형태의 소나무가 10여 그루 뿌리내리고 있다. 일몰 사진에도 자주 등장하는 풍경이다. 늘어뜨린 소나무 가지 아래로 발갛게 떨어지는 태양을 보며 변산 드라이브 70km 여정을 마무리한다.
부안=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여행메모]
●부안 해안지역은 18개 코스의 ‘부안 마실길’로 연결돼 있다. 다음달 1~3일 부안 일대에서 ‘마실 축제’가 예정돼 있다. ●부안 사람들은 전주 못지않게 맛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새만금방조제 공사 이후 백합생산은 부쩍 줄었는데도 곳곳에 백합전문식당이 즐비하다. 행안면 계화회관(061-851-0333)은 백합구이 백합탕 백합찜으로 소문난 식당이다. ●변산면 해변촌탈아리궁(581-5740)은 갑오징어 전문식당이다. 매콤한 양념으로 버무린 갑오징어 돌판구이가 주 메뉴이고, 오징어 먹물을 첨가해 새까만 오죽도 맛볼 수 있다. ●변산자연휴양림 뒤편 언덕 도로변에 위치한 광주집(010-9175-2317)은 조개찜이 전문인데 반찬으로 나오는 김치가 일품이다. 커다란 접시에 무 배추 갓 양파김치를 가득 내온다. 시원한 맛의 비결은 바닷물로 절이는 것이란다. 김치만 따로 팔지는 않는다. ●부안의 대표적인 숙소는 ‘대명리조트 변산’이다. 격포해수욕장이 코앞이고, 아침에 채석강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올 2월에 문을 연 국립변산자연휴양림은 38개 국립휴양림 중 유일하게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어서 평일에도 예약이 찰 정도로 인기가 높다. 모항에서 가깝다. 독립된 통나무집이 없고, 산림휴양을 내세우기에는 숲이 부족하다는 것이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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