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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인 줄 알았더니 후시딘…” 갈길 먼 시각장애인 ‘투약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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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인 줄 알았더니 후시딘…” 갈길 먼 시각장애인 ‘투약권’

입력
2017.11.04 04:4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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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사항 아닌 권고에 그쳐

점자표기 의약품 0.2%뿐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시각장애인 손지민(34)씨는 올해 초 저녁부터 열을 동반한 두통을 느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정말 아찔했다“고 했다. 사연은 이렇다. 병원은 이미 닫았을 시간인데, 점점 심해지는 통증. 급한 대로 책상에 놓여 있던 상비약을 꺼내먹었지만 두통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약을 다시 복용했지만 두통은 심해져 갔다. 의문은 활동보조인이 와서야 풀렸다. “두통이라면서 잇몸 약은 왜 먹은 거냐”는 그의 질문. 약 포장 형태와 크기가 비슷해 촉각으로 구분할 수 없었던 손씨가 잇몸 약을 두통약으로 착각해 두 번이나 복용했던 것이다. 손씨는 “기본 상비약인 두통약조차 점자 표시가 없어 도움 없이는 약 한 알 먹기도 어렵다”고 한숨을 쉬었다.

4일 점자의날을 맞아 의약품에 점자 표시를 해달라는 시각장애인 요구가 뜨거워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이 시각장애인 20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절반 이상(51.2%)이 가족이나 주변 사람 도움으로 의약품을 구분하고 있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따르면 현재(8월 기준) 의약품 3만9,803개 중 점자 표기된 품목은 82개, 겨우 0.2%에 불과하다.

원인은 약사법상 점자 표기가 ‘권고’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편의점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안전상비의약품은 의사와 약사의 복약 지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필요성이 더 높지만, 이 역시 점자 표시 품목은 13개 중 4개뿐이다. 의무사항이 아닌데다 굳이 비용을 더 들일 이유가 있느냐는 생각이 깔린 탓이다.

이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시각장애를 앓고 있는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은 “시각장애인들이 안구 건조 방지 등을 위해 매일같이 쓰는 안약에조차 점자 표시가 없다”며 “상처에 바르는 후시딘 연고나 무좀약을 안약인 줄 알고 눈에 넣는 바람에 응급실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일부 시각장애 부모는 아이에게 줘야 할 해열제가 어떤 것인지 몰라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안고서 발만 동동 구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의약품 보관 방법 등 필수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다. 시각장애인 A씨는 “냉장 보관을 해야 하는 안약인데 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실온에 보관하며 사용했다가 시력이 더 나빠졌다”고 주장했다. 홀로 거주하거나 시각장애인끼리 거주하는 경우 “몸이 아파도 약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어 힘들게 병원을 갈 수밖에 없다”는 토로도 나온다.

시급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개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4월 윤소하 정의당 의원은 의약품의 용기, 포장 및 첨부문서에 점자 또는 음성변환용 코드를 표시하도록 하는 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약값 상승 등을 이유로 반대 의견도 만만치는 않아 법 통과를 자신하기는 어렵다. 2015년에도 박명재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전체 약품에, 정문헌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안전상비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모두 폐기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치료에 필요한 수입의약품 공급이 지연될 수 있다며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김 연구원은 “의약품에 대한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접근권은 배려가 아닌 의무다”라고 강조했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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