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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6.08.16 13:37
수정 : 2016.08.16 13:44

[김월회 칼럼] 헌법이 뺨 맞은 날에 든 단상

등록 : 2016.08.16 13:37
수정 : 2016.08.16 13:44

아무래도 이번 71주년 광복절은 역사에 길이 남을 듯싶다. 경축식장에서 헌법이 보란 듯이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건국절’ 얘기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조차 인정했던 3ㆍ1 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이 부정당했다. 헌법이 제대로 강타당한 셈이다. 더구나 가해자는 그 헌법에 의거하여 뽑힌 대통령이었다.

헌법을 무시함은 거기에 규정된 민주주의를 무시함이고, 자신은 헌법 바깥에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국법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여긴 셈인데, 역사에서 이에 해당하는 경우를 찾아보면 봉건시대의 군주가 얼추 이에 들어맞는다. 그동안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당하고 타당한 비판과 제언이 도통 먹혀 들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던 게다. 그렇다면 봉건시대에 나왔던 군주에 관한 논의들을 가지고 얘기해보자.

‘논어’엔 이런 구절이 있다. “미자는 떠나버렸고 기자는 노예가 됐으며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미자와 기자, 비간은 약 3,000여년 전 은나라 말엽의 인물로 왕실의 종친이자 고위직에 있었던 이들이다. 당시 천자는 주왕이었는데 그는 ‘4대 폭군’의 하나로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 전하게 된 인물이었다.

그의 폭정이 갈수록 심해지자 미자가 수차례 충언을 올렸다. 주왕이 듣지 않자 그는 조정을 떠났다. 기자도 나서서 직언했다. 그럼에도 주왕의 폭정은 여전했다. 그러자 미친 척하며 노예가 되어 주왕 곁에서 떠나갔다. 이번엔 비간이 나섰다. 그는 끈질기게 간언했다. 그러자 주왕은, 성인은 심장에 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던데 진짜 그런지 한번 보자며 그의 배를 갈라 죽였다. 그렇게 비간은 죽음으로써 주왕의 곁을 떠났다. 방식은 달랐지만 셋 모두 그렇게 조정을 떠나갔다.

그런데 공자는 이들을 어진 이, 그러니까 인자라고 평가했다. 자신이 그렇게 아끼던 안회에게조차 인자라는 평가를 아꼈던 공자였음을 보건대, 이는 극찬에 가까운 평가였다. 그래서인지 이 셋이 취한 행동은, 이후 신하가 폭군이나 혼군(昏君) 같은 함량 미달의 군주와 맺는 세 가지 행동 유형의 전형으로 사유됐다. 곧 직언이 먹히지 않을 때 취할 수 있는, ‘조정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기’, ‘조정 가까이에 있지만 정사에 간여하지 않기’, ‘의롭게 죽음으로써 군주와 하직하기’의 세 방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지금의 관료에게도 마찬가지이듯 당시 신하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군주의 잘잘못에 대한 직언이었다. 직언하지 않는 신하는 함량 미달의 신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직언하는 이들이 그러저러한 방식으로 조정을 떠나면 군주 곁엔 과연 어떤 유형의 신하들만 남아 있게 될까.

맹자는 공자를 사숙한 이답게 그러나 공자보단 훨씬 세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답게 한결 강경하게 나왔다. 그는 군주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주가 직언을 듣지 않으면 고위직 가운데 군주와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이들은 다른 나라로 훌쩍 가버리지만 인척인 자들은 군주를 제거한다고. 그리고 주왕 같은 폭군을 쫓아냄은 군주를 축출한 게 아니라 일개 필부를 제거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역사에 도도하게 유전된 역성혁명론의 요체다.

이는 맹자만의 특이한 견해가 아니었다. 역시 4대 폭군의 하나였던 주나라의 여왕은 나라 사람들에 의해 축출됐다. 2,800여년 전쯤에 발생했던 일이다. 역사는 국가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며 갱신하는 데의 주요 원천이다. 역성혁명이란 사유가 고대 중국인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게 된 까닭이다.

하여 진나라의 군주가 현자로 이름난 사광에게 옆 나라 사람들이 군주를 축출한 것은 심하지 않냐고 묻자, 사광은 백성의 생활을 곤궁케 하는 군주를 어디에 쓸 수 있겠냐면서 제거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백성 위에서 방자하게 굴며 악행을 일삼아 하늘과 땅으로부터 받은 천성을 잃게 하는 ‘한 사람’을 하늘이 결코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유교 경전인 ‘춘추좌전’에 나오는 말이다.

유가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진시황을 길러낸 여불위는 군주답지 않은 이들을 제거하고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군주의 도를 행하는 이들을 옹립해온 게 저 옛날부터의 역사라고 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군주의 덕이 통하지 않고 백성의 바람이 전달되지 않는 것이 나라의 울증(鬱症)이다. 나라의 울증이 오래되면 갖은 악행과 재난이 한꺼번에 일어나며 상하가 서로 해치게 된다. 성왕이 꼿꼿한 인사와 충직한 신하를 귀히 여김은, 그들이 직언을 하여 울증을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그가 책임 편찬한 ‘여씨춘추’에 실려 있는 말이다. 단상을 쾅쾅 치며 불통을 드러낸 지도자,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바로잡지 못한 관료들 그리고 국가의 요람인 역사를 내놓고 학대하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인, 학자들. 그들이 ‘사회적 갑’으로 행세하는 세상. 헌법이 보란 듯이 뺨 맞은 어느 날, 문득 든 단면들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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