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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제조기 아닌 구도자로 일엽 주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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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제조기 아닌 구도자로 일엽 주목을”

입력
2017.08.0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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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최고의 비구니라 일컬어지는 일엽 스님. 일제시대 신여성으로 살았던 행적 때문에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박진영 아메리칸대 교수는 영문판 평전을 통해 ‘수도승’ 일엽의 불교철학을 재조명한다. 김일엽문화재단 제공
한국 불교 최고의 비구니라 일컬어지는 일엽 스님. 일제시대 신여성으로 살았던 행적 때문에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박진영 아메리칸대 교수는 영문판 평전을 통해 ‘수도승’ 일엽의 불교철학을 재조명한다. 김일엽문화재단 제공

“그간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는 나혜석, 윤심덕 등과 함께 자유연애를 주장한 신여성이었다, 사랑에 실패해 결국 비구니가 됐다는 식의 통속적인 얘기들뿐이에요. 그게 아니라 진정한 구도자였다는 점을 일깨워드리고 싶었어요.”

9일 ‘Women and Buddhist Philosophy ; Engaging Zen Master Kim iryop(여성과 불교철학 ; 김일엽 선사를 통하여)‘를 내놓은 미국 아메리칸대 박진영 교수의 말이다. 제목에서 보듯 책은 한국 불교 최고의 비구니라 일컬어지는 일엽(1896~1971)의 일대기를 다룬,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출간된 영어 평전이다. 일엽에 대한 우리말 평전이 없는 상황에서 영어평전이 먼저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박 교수의 공이다.

박진영 아메리칸대 교수
박진영 아메리칸대 교수

불교연구자로 미국에서 활동 중인 박 교수는 여성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컸다. “1980년대부터 여성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종교와 여성’이라는 프로젝트가 이어집니다. 여러 종교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연구하는 붐이 일지요.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비구니 문화가 가장 강한 나라로 꼽히는데, 정작 기록이 드물어서 비구니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어요.”

더구나 불교는 성평등에 가장 근접한 종교다. 여성과 불교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질 법 하다. 영문으로 쓴 일엽 평전은, 해외 연구자와 신도들의 이런 갈망에 대한 응답이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뒤 올해 책을 냈으니 14년간 공들인 작업이다.

일엽 스님 평전 영문 표지. 김일엽문화재단 제공
일엽 스님 평전 영문 표지. 김일엽문화재단 제공

박 교수는 단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철학적 면모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더 기쁘다고 했다. “춘원 이광수가 아낄 정도로 문재가 뛰어난 당대 최고의 엘리트 신여성이었다는 점만 부각되다 보니 연애, 동거, 결혼, 이혼 같은 얘기만 무성해요. 1933년 출가 이후 1971년 입적 때까지 한국 불교의 비구니 지도자로서 활동한 부분 또한 엄청나게 큰 데 말이지요.” 일엽은 한국 불교 화두선의 대가라는 경허 스님의 제자 만공 스님 밑에 있었다. 수도승으로서의 일엽을 가벼이 볼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일엽만의 독자적인 사상이랄 만한 것이 있을까. “업이나 윤회 같은 큰 얘기보다 삶에 밀착된 수행을 강조한 점이 독특합니다. 실제로 ‘수행이란 결국 창조성의 발휘이고 창조성이 드러난 것이 문화다, 부처란 대문화인이다’라는 말씀을 하세요. 결국 억압에서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박 교수는 이 때문에 가부장제에 반대해 싸우던 ‘신여성 일엽’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선승 일엽’이 된 게 아니라, 신여성으로서나 선승으로서나 똑 같은 방향으로 걸었지만 그 길이 세속이냐 종교냐의 차이였을 뿐이라고 본다.

일엽이 법문을 하면 비구니들 뿐 아니라 천주교 수녀, 원불교 교무 등도 그 법문을 듣기 위해 왔다. 사진은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법문 뒤 기념촬영한 사진. 맨 뒤에 앉아 있는 이가 일엽이다. 김일엽문화재단 제공
일엽이 법문을 하면 비구니들 뿐 아니라 천주교 수녀, 원불교 교무 등도 그 법문을 듣기 위해 왔다. 사진은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법문 뒤 기념촬영한 사진. 맨 뒤에 앉아 있는 이가 일엽이다. 김일엽문화재단 제공

박 교수의 이런 연구가 반가운 건 일엽의 제자들이다. 김일엽문화재단 부이사장 경완 스님은 “여러 어른들께 늘 들어왔던 얘기가 ‘일엽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수행만큼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뛰어났다’는 것이었는데, 실제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해볼 수 있는 이런 책이 나와 매우 기쁘다”면서 “출가 이전보다 출가 이후의 일엽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은 역시 책이 영어본만 나왔다는 점이다. 일엽의 온전한 면모를 우리에게 알리긴 부족한 셈이다. 평전의 한국어판 출간도 추진해보고 싶다. 한가지 더 있다. 1960년대 일엽이 내놓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어느 수도인의 회상’ 같은 책들의 재발간이다. 경완 스님은 “일엽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인 만큼 요즘 사람들에게 다시 읽히고 싶은데, 옛 어투의 문장이라 요즘 문장으로 새로 다듬어 내는 작업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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