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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햇감자를 삶아 먹는 날

입력
2017.07.0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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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보낸 감자가 도착했다. 박스를 열자 채 마르지 않는 흙 냄새와 생감자의 달달한 비린내가 훅 끼쳤다. 올해는 80%가 자주색 감자다. 몇 해 전 박스 귀퉁이에 새치름하게 자리 잡고 제 존재를 알리더니 그새 요놈이 우리 집 감자밭을 장기 집권해온 미색 감자를 멀어내고 왕좌를 꿰찬 것이다. 자색 감자에 단백질과 미네랄, 항산화 물질이 많다는 이야기를 어느 방송에서 본 기억이 난다. 지난 6월 중순, 고향에 갔을 때 직접 감자를 캐고 싶었다. 호미 들고 촐랑거리는 내 뒤통수에 대고 엄마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소리쳤다. 올 봄 가뭄이 심해 알이 여물지 않았다고.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라도 나의 눈이 그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그때 감자밭은 초록 줄기가 여전히 우세했으므로.

감자로 말하자면 농부의 딸로 태어난 내가 파종부터 김매기, 수확까지 참여하며 생장과정 전모를 지켜본 첫 농작물이었다. 어느 4월 저녁 아버지는 토광에 있던 감자 바구니를 꺼내 어린 딸들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가 씨감자 만드는 법을 시연한 다음날, 우리 자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밭두둑에 파종을 했다. ‘아이 발자국 간격으로 주먹만한 홈을 내서 씨감자 한 알씩 넣은 뒤 흙을 덮고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려주어라.’ 우리는 감자밭 김매기에도 동원되었다. 개망초나 쇠비름, 명아주 솎아내는 일은 고됐지만 그 무렵 피는 감자 꽃 색채에 홀리고 오디와 머루를 따먹느라 그게 노동인지 놀이인지 구분조차 안 갔다. 그리고 6월이 가기 전에 수확을 했다. 호미로 땅을 파서 줄기 하나를 힘차게 들어올리는 순간 드러나는 알감자의 위용은 경이로웠다. 땅에 묻은 한 조각 씨감자가 열 개 넘는 햇감자로 변신을 하다니. 그건 우리 시야에서 꽃피우고 열매 맺고 영글어 가는 참외나 복숭아 포도와는 다른 차원의 기쁨이었다.

하기야 그 속성 때문에 유럽에서는 한동안 감자를 외면했다지. 1588년 처음 유럽에 상륙한 감자는 오랜 세월 나병과 방탕함을 몰고 오는 악마의 식물로 불렸다. 미개한 식민지 원주민의 주식이라는 편견보다 강하게 유럽 기득권층의 심기를 건드린 건 척박한 땅 밑에서 왕성하게 세를 불리는 감자의 속성이었다. 별다른 문명의 개입 없이도 저 홀로 뻗어가는 모습이 원시적 야만성을 연상시킨 것이다. 1794년 영국의 밀 흉작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몇몇 선구자가 감자 농사를 장려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똑똑한 경제학자와 저널리스트가 들고 일어났다.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두막 바닥에서, 돌 구덩이 위 냄비 주변에 가족이 웅크리고 앉아 손으로 감자를 집어먹는다. 곁에는 돼지도 한 마리 있어서 냄비에 주둥이를 대고 감자를 꺼내 먹기도 한다.’ 일찌감치 감자를 주식으로 받아들인 아일랜드를 취재하고 돌아와 이 저주받은 식물이 그러잖아도 게으르고 더러운 북쪽 오랑캐를 어떻게 야수의 단계로 끌어내렸는지 고발한 윌리엄 코베트의 글이다. 심지어 경제학자 리카도는 감자로 식욕을 해소한 하층민이 비이성적 성욕에 빠져 수요보다 많은 인구를 생산할 경우 시장경제는 파탄 나고 인류는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845년 감자 잎마름병이 덮치며 아일랜드인 100만 명이 굶어죽은 사건은 감자에 대한 그들의 저주를 역설적으로 완성한 셈이지만, 이후 이 식물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21세기 문명인의 주요 식량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깨끗이 씻은 감자를 끓는 물에 넣어 삶자니 코웃음이 나왔다. 이 현실을 맬서스나 리카도가 봤어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시장논리 운운하기 전에 굶어 죽는 이웃에 대한 연민을 가졌어야지. 햇감자를 베어 물며 힘이 솟구친 나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그분들 하나하나를 다시 불러내 잘근잘근 씹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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