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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는 보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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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는 보수가 아니다”

입력
2017.07.0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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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언론인 제발트의 인터뷰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가 번역

재임 중 ‘강경보수’ 비난 받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데 서툴 뿐

신학자로서 콘텐츠는 ‘개혁적’

‘유겐트’ 활동 논란 있었지만

무신론 위험성 뼈저리게 느껴

2013년 12월 23일 성탄절을 맞아 반갑게 인사하고 있는 현직 교황 프란치스코(오른쪽)와 전임 교황 베네딕토16세.
2013년 12월 23일 성탄절을 맞아 반갑게 인사하고 있는 현직 교황 프란치스코(오른쪽)와 전임 교황 베네딕토16세.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임자,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는 비난의 표적이었다.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강경 보수’라는 비판이다. 이 주장이 확산되다 보니 2013년 2월 자진사임을 발표했을 때도 ‘뒤에 숨어 상왕 노릇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를 둘러싼 이런 오해를 깨기 위한 책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마지막 이야기’(가톨릭출판사 발행)가 번역되어 나왔다. 독일 언론인 페터 제발트가 여러 차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했고,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가 번역했다. 기자의 집요하고 공격적 질문에 대해 베네딕토 16세가 내놓은 상세한 답변이 들어 있다. 김 주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말했다.

책의 가장 큰 줄기는 ‘보수적인 베네딕토 16세’라는 고정관념이 ‘콘텐츠’의 문제라기보다는 ‘스타일’의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제발트가 요한 바오로2세와 베네딕토16세를 비교해놓은 문장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한 교황은 신비적이고 마리아에 친근하며, 다른 교황은 학식이 높고 예수님에게 친근하다. 한 교황은 행동적인 인물이며, 다른 교황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수줍은 일꾼이자 인기를 포기했던 말씀의 인물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구설수에 제법 올랐다. 성모 마리아의 기적을 너무 열심히 챙기다 보니 신비주의로 흘러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다. 동유럽 폴란드 출신이어서 ‘전근대적’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서구적 합리성을 상징하는 신학자 라칭거는 이에 대한 보완재 역할을 했다. 실제 두 사람은 궁합이 잘 맞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라칭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라”고 말했고, 라칭거는 정말 독실한 교황의 믿음과 대중을 향한 카리스마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문제는 라칭거가 교황으로서 전면에 나섰을 때다. 베네딕토 16세는 스스로도 자신의 스타일에 약점이 있음을 선선히 인정했다. “교리 교육에 대해 정통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인간적으로 묘사할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단상에서 평범했고 목소리에 힘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는 정신적인 일을 생각하고 숙고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은 저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제 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와 같은 말들을 내놓았다.

2011년 9월 베네딕토 16세의 독일 방문 때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베를린 시민들. 독일 출신 교황이었지만, 독일에서 가장 냉대받은 교황이기도 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1년 9월 베네딕토 16세의 독일 방문 때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베를린 시민들. 독일 출신 교황이었지만, 독일에서 가장 냉대받은 교황이기도 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라칭거는 이 책에서 자신의 여정을 상세히 소개한다. 그는 1927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히틀러의 청소년 조직 ‘유겐트’에 가입한 것 때문에 교황이 된 뒤 비난받았다. 이 때문에 독일 출신인데 독일에서 가장 냉대받는 교황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는 히틀러를 통해 ‘무신론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 때문에 더욱 신앙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실제 그의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들이었고, 모두들 나치를 경멸했다.

라칭거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유대계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 등과도 교류했다. 이를 통해 그는 종교간 장벽을 넘어 갈라진 형제들이 한 자리에 다시 모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교황이 된 뒤 개신교 예배에도 참여하고 이슬람 사원을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교황청 과학아카데미원장에 개신교 신자를, 교황청이 설립한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교수에 이슬람 신자를 임용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이들을 다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하다 지나친 발언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공부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그의 실력은 차츰 소문이 났고 이 실력을 토대로 가톨릭 현대화의 원년으로 꼽히는 1961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문위원으로 발탁됐다. 당시 가장 강력한 개혁을 주장한 이는 ‘혁명가’란 별명으로 불리던 프링스 추기경이었다. 그러나 프링스 추기경이 내놓는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논거의 대부분은 젊은 신학자 라칭거의 손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바티칸공의회를 열었던 요한23세 교황은 “공의회의 참 뜻이 라칭거로 인해 드러났다”고 격찬하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마지막 이야기'를 번역한 김선태 주교. 베네딕토16세가 보수라는 오해를 벗기고 싶다 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마지막 이야기'를 번역한 김선태 주교. 베네딕토16세가 보수라는 오해를 벗기고 싶다 했다.

이렇게 개혁적인 인물이라도 밖에서는 보수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래서인지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스타일’에 대해 베네딕토16세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온정”을 느끼게 해주고 “시대의 문제를 영적으로 대하는 태도”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카리스마”를 선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베네딕토 16세에겐 다만 서툰 일일 뿐이다. 학구적인 그가 인터뷰 말미에 선택한 자신의 묘비 문구는 이것이었다. “진리의 협력자”.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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