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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나’ 대 ‘나c’

입력
2017.03.2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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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는 여집합이란 개념이 있다. 특정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일컫는 말이다. 가령 U라는 전체집합이 있다고 치자. A는 그 집합에 속하는 부분집합이다. 이때 A의 여집합(Ac)이라고 하면, 그건 집합 U에 속하면서 A가 아닌 나머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U와 A가 사람을 원소로 한다고 쳐보자. 이를테면 우리 마을 사람 전체를 U로 하고 나를 A로 해보자는 것이다. 그럼 Ac은 나를 제외한 우리 마을 사람들이 된다. 수학적으론 하등의 오류가 없는 이해다. 그런데 이를 바탕으로 “우리 마을은 나와 그 나머지로 이뤄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마을은 나로 대변된다”, “내가 곧 우리 마을”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머지’와 ‘남’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남은 나와 대등하다고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남은 몹시 거슬려도 제거할 엄두를 쉬이 내지 못하지만 나머지는 조금만 성가셔도 서슴없이 치워내려 한다. 그러니 ‘나 대 나머지’란 구도로 타자를 보는 시선은 ‘나와 남’의 구도로 보는 정신에 비해 혹독한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자기나 남을 가리켜 ‘잉여’니 ‘유령’이니 하는 풍조가 번지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잉여 곧 나머지는 그것을 나와 다른 부류로 여겼다는 얘기다. 예컨대 중국인이 대대로 주변 이민족을 ‘오랑캐’로 간주했듯이, 내가 사람이면 나머지는 사람으로 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기>에 보면, 요임금과 순임금은 흉악무도한 악한을 사방으로 내쫓아 그들로 이역의 오랑캐를 다스리게 하여 태평성대를 일궜다고 한다. 오랑캐를 다른 부류로 간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에는 군주가 없어도 오랑캐에 성군이 있음보다 낫다”는 공자의 단언이 새삼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송대 동아시아 세계의 스타였던 대문호 소동파가 “아무리 성군일지라도 오랑캐를 교화할 수는 없다”고 확신한 연유기도 하다.

한마디로 타자를 있으면 병폐, 없애도 별 문제없을 나머지로 봤다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교화나 소통보다는 배척이나 소탕 대상으로 손쉽게 치부됐다. 대량학살도 곧잘 일어났다. <서경>에는 성군 주 무왕이 폭군 상의 주왕을 쳤을 때, 죽인 병사의 피가 시내를 이뤄 절구 공이가 떠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과도하게 부풀려진 서술이지만, 대규모 학살이 있었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없애야 할 나머지로 여겼기에 생겨났던 일이다.

저 옛날 동양에서나 그랬던 게 아니다. 신대륙에 진입한 서구는 원주민을 ‘사냥’하듯 제압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선 유태인 학살이 빈발했다. 일제는 여염집 여성을 ‘성 노예’로 징발했으며, 나치가 유태인에게 했듯이 조선인을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취급했다. 또한 중국 난징에선 수십만의 양민을 학살했다. 미국은 전쟁을 끝낸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핵폭탄을 투여했다. 지난 세기 후엽 유럽, 아프리카에선 적대세력에 대한 ‘인종청소’가 자행됐다. 모두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자행됐던 참혹한 만행들이다.

국가나 집단 차원서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남을 나의 나머지로 보는 이들은 삶과 사회를 주로 제로 섬(zero-sum)적 적대 관계로 본다.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 나의 행복은 남의 불행’이라 믿고, 나이키 광고 문구처럼 “You don’t Win Silver, You Lose Gold.(당신은 은메달을 딴 것이 아니라 금메달을 놓쳤다)” 식으로 매사에 임한다. 그들은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며 내가 곧 전체라는 착각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재벌이나 독재자가 내가 곧 기업이요 국가라고 철석같이 믿듯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위정자가 돼서도 전체 파이를 키울 줄 모른다. ‘집합적 부’엔 관심이 없고 기존 파이에서 자기 몫을 늘리는 데 집중한다. 설령 파이를 키워도 늘어난 몫을 독점하는 데 급급해 한다. 맹자가 설파한, 백성의 부유함이 군주의 부유함이라는 이치는 ‘루저(looser)’의 볼멘소리 정도로 치부한다. “군주는, 천하가 먼저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하고, 천하가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한다”는 선우후락(先憂後樂) 같은 진리는 아예 씨알조차 먹히질 않는다. 그들이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수구적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무조건 타자를 남으로 대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남이 나를 나머지로 본다면, 또 그런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좀 더 따져봐야 한다. 그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강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강자가 자기 잘못을 반성하지도 않고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특히나 그렇다. 사람은 성찰할 줄 알고 나아지려 노력하며 기어코 나아지기도 하는 존재다. 반면 개, 돼지는 사죄도 또 회개도 할 줄 모른다. 힘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남을 나머지로 여기며 그저 물어뜯는다.

그러한 부류를 굳이 나와 동류인 남으로 대할 까닭이 있을까. 비정상을 바로잡기 위해선 나와 그 나머지란 구도도 때론 ‘제한적’으로나마 활용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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