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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독종(毒種)은 이제 그만!

입력
2014.12.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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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위인들은 참 지독했다

허황하고 모순된 대의명분 대신

삶의 소소한 행복에 눈길 주자

‘날은 저무는데 길은 멀어(日暮途遠) 순리를 거슬러 거꾸로 행했다(倒行逆施).’ 사기(史記) ‘오자서(伍子胥) 열전’의 유명한 구절이다.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이 초(楚) 평왕(平王)에게 억울하게 죽어간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우여곡절 끝에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하나인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움직여 초를 치고, 평왕을 무덤에서 꺼내어 구리 채찍으로 때려서 분을 풀었다. 아무리 원한이 깊어도 죽은 사람까지 욕보이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더욱이 한때 섬기던 주군(主君)을 능욕하는 것은 천리(天理)에 어긋난다는 벗 신포서(申包胥)의 지적에 ‘날은 저무는데…’로 변명했다. 변명다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옛 먹물끼리의 대화여서 ‘천리’니 ‘순리’를 들먹였을 뿐, “사람이 왜 그리 독해?”라는 질책에 “세상이 날 그렇게 만들었잖아!”라고 변명한 데 불과했다.

그런데도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은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다”고 오자서의 원한을 정당화했다. 한(漢) 무제(武帝)의 미움을 사서 치욕적 궁형(宮刑)을 당하고도 사기 집필에 매달렸던 스스로의 절치부심(切齒腐心)에서 나온 동류(同類)의식이나 연대감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그의 뜻대로 오자서의 이름은 후세에 남았고, 자신의 이름은 더욱 크게 남았다. 그러니 그는 하늘에서 행복할까.

일본에도 지독한 원한과 복수의 역사가 있다. 소설과 가부키, 영화, 드라마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돼 온 ‘추신구라(忠臣藏)’다. 지금의 고베(神戶)에 있던 ‘아코항(赤穗藩)’이라는 작은 제후국의 가신 47명이 가로(家老) 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內藏助)를 중심으로 뭉쳐 억울하게 죽어간 주군의 복수를 하고 모두 자결하는 내용이다. 복수를 위한 야밤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미화되고, 하루 아침에 가장을 잃은 쌍방의 그 많은 식솔들의 불행도 파묻힌다.

대중적 삶의 긴 궤적 대신 굵은 사건이나 뛰어난 인물에 초점을 맞춰온 이런 역사인식에 따르는 한 역사는 위인들의 행적을 꿰어 놓은 것이다. 그런 역사라면 왕후장상(王侯將相)에게만 읽히지, 장삼이사(張三李四)까지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 개천에서 날 용을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이미 나이 먹어 용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까지 그런 역사인식에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

개인적으로 영화 황산벌의 계백 장군 출사(出師) 장면에 크게 공감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후 홀가분하게 최후의 싸움에 나서려던 계백에게 아내는 애들이 무슨 죄냐고 따진다. 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고 되받아 친다. 희극적 대사지만 그저 웃어 넘기기 어렵다.

계백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대부분은 독종(毒種)이다. 하기야 전통사회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은 효의 궁극인 동시에 자손들의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 지름길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한 대의(大義)의 실천은 사회적 이익의 향유나 재화 재분배 과정의 우위 선점 등 소리(小利)와도 은연중에 통해 있었다. 스위스 루체른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를 몸으로 에워싸고 화살을 받는 스위스 용병들의 모습을 그린 동상이 있다. 그렇게 죽어가지 않다가는 척박한 고향 땅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용맹이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 대를 물려 거대한 부(富)를 누리는 재벌을 빼고는, 더 이상 가족과 주변 동료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대의를 좇아 이름을 드높일 이유가 많이 흐려졌다. 입신양명의 사회적 교환가치가 그만큼 낮아졌다. 사회정의도 늘 양날의 칼의 모습을 띤다. 대신 자신과 가족, 가까운 이웃의 행복을 조화시키는 삶의 가치가 점점 커지고 있다. 신기루 같은 대의에 매달리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행복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가치다. 그러니 주어지는 게 아니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큰 슬픔과 혼란을 뒤로 하고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새해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조동진의 노래처럼 작은 별과 바람결에서라도 살아있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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