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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 번 속고 또 속으면 속은 사람 잘못

입력
2018.04.17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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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년 전 미국 버락 오바마 정권은 당시 한국의 야권 세력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어떤 이들은 매우 놀라고, 누군가는 당연하게 여기겠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관들은 ‘뻔뻔하다’(shameless)는 표현을 썼다. 27일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에 대비, 당시 한국과 미국 사이의 외교 비밀을 폭로한 ‘위키리크스’를 검색한 결과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첫 방한인 2009년 11월 주한 미국 대사관은 ‘기밀’로 분류한 동향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주한 미국 대사관은 친미 성향이 뚜렷한 이명박 정권을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한국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부상하는 걸 지원하는 게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고 분석했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 2008년 금융위기에 정확하고 발 빠르게 대응했으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 위상을 높였다고 적었다. 더 나아가 ‘이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 기간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 대사관은 이례적 주문의 배경으로 2008년 촛불시위를 언급했다. “이 대통령이 우리(미국) 쇠고기 수입을 재개키로 결정하자, 대선ㆍ총선 패배에 앙심을 품은 반대 세력은 ‘뻔뻔하게’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고 지적했다.

해당 문서를 읽으면서 사회부 사건팀장으로 겪었던 10년전 상황이 떠올랐다. 시위 양상과 참가자가 그 이전까지와는 너무 달라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전까지 시위ㆍ집회 시간과 장소는 소수 지도부가 결정했고, 참가자도 대부분 남성(일부는 각목ㆍ쇠파이프로 무장)이었다. 그러나 외부 세력이 개입하기 전까지 ‘촛불시위’에는 지도부가 없었다. 여러 시민이 SNS로 순식간에 합의해 ‘게릴라ㆍ아메바’식 시위를 벌였고, 참가자 중에는 여학생과 가정주부도 많았다.

많은 여학생들은 당시 인기절정이던 ‘동방신기’ 오빠들을 광우병 쇠고기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외쳤다. 젊은 엄마들도 밤중에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시위 현장에 나왔다. ‘미국산 쇠고기=광우병’이라는 말은 사실에서 벗어난 것이었지만, 참가자 대부분은 너무 착했고, 모두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잘못된 주장을 믿은 탓에 10년전 촛불시위는 사회적 비용만 잔뜩 초래했다. 지난해 ‘2차 촛불시위’로 정권을 잡은 현 집권세력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 톰 니콜스(Tom Nichols)의 ‘분석 틀’을 빌리면 한국은 미국만큼이나 ‘선동 정치’가 통하기 좋은 나라다. 그는 지난해 미국 유권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뽑은 이유를 파헤친 ‘전문지식의 죽음’(The Death of Expertise)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을 읽으면 ▦적당히 유식한 군중 ▦잘 갖춰진 정보기술(IT) 환경 ▦사실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언론이 ‘선동 정치’를 키우는 3대 조건임을 알 수 있다. 다양한 IT기기로 거짓 정보와 뉴스에 계속 노출되면 적당히 유식한 군중들은 스스로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으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는 얘기다.

요즘 과거처럼 이상한 일이 반복된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일수록 알고 보면 구린 경우가 많다. 일자리를 늘리겠다는데 실업률은 계속 높아진다. 최저임금 올렸다는데 살기 좋아졌다는 말도 듣기 어렵다. 과거 잘못을 반성하고 달라지겠다는 정파에서도 여전히 내부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은 정신 차리고 주위를 다시 살펴야 한다. 옳은 줄로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욕심을 채우는데 이용 당한 건 아니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처음 속으면 상대방 잘못이지만 그 다음에 또 속으면 내 잘못이라는 말이 있다. 애덤 스미스가 옳은 일보다 개인의 이기심을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조철환ㆍ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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