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한 기사
사건 제대로 확인도 않고 기사화
경찰 수사서 "증거 없다" 결론
롤링스톤 편집국 시스템 허점 투성이
편집장 "모든 단계 잘못" 인정하지만
시스템 개선 의지는 없어 비판 고조
여기 대학 신입생인 한 소녀가 있다. 펼쳐질 학교 생활에 대한 꿈으로 설레던 시기, 학교 수영장에서 안전요원으로 함께 일하던 3학년 남학생이 그를 남학생 사교파티에 초대했다. 달콤한 시간을 보내던 그를 남학생이 파티장 위층의 방으로 데려간다. 남학생이 자신의 뒤에서 문을 닫은 순간 그녀는 방에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공포로 몸을 돌리자 커피 테이블이 넘어져 깨지고, 그녀는 7명의 남학생에게 차례로 성폭행을 당한다. 그날 새벽, 그녀는 자신의 친한 친구 3명에게 자신이 당한 범죄를 털어놓는다. 자신을 감싸고 격려하는 대신 ‘성폭행을 신고하면 다시는 사교 파티에 초대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친구들의 반응에 소녀는 피 묻은 붉은 드레스를 움켜쥔 채 눈물을 떨군다.
비극적이고 끔찍한 성폭행 범죄 현장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직 피해자의 증언에만 의존해 작성된 기사라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미국 대중문화잡지 롤링스톤이 지난 5일, 자사의 기사 하나를 공식 철회했다. 캠퍼스 성폭행 문제를 ‘재키’라는 한 피해자에 초점을 맞춰 조명한 것으로 지난해 11월 19일 ‘캠퍼스의 성폭행’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기사였다. 기사에서 버지니아대 여학생 ‘재키’는 2012년 9월 남학생 사교 클럽 파티에 갔다가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기사가 보도된 후, 버지니아대의 성폭행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그러나 얼마 후 워싱턴포스트를 필두로 다른 언론들이 기사에서 입증되지 않은 사실관계 등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롤링스톤은 기사가 게재된 지 약 보름만인 12월 5일 기사의 주요 취재원인 재키 증언에 신뢰성이 부족했다며 오보를 인정하는 내용의 편집자 주를 게시했다. 이후 경찰은 성폭행 사건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기사 철회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커지자, 롤링스톤은 콜롬비아 언론대학원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건 조사를 의뢰했다. 그리고 오보를 인정한지 4개월 만인 지난 5일 해당 오보 관련 보고서가 롤링스톤 홈페이지에 게시됐다. ‘캠퍼스의 성폭행, 무엇이 잘못됐나?’라는 제목의 1만2,644단어에 달하는 보고서는 이 오보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저널리즘의 실패작’이라고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취재진이 기사를 내보내기 전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했어야 했던 세가지 쟁점을 짚었다.
첫번째 쟁점은 재키의 세 친구들이다. 재키는 성폭행을 당한 날 밤 친구 라이언, 알렉스, 캐서린을 찾아갔다고 기자에게 증언했다. 재키는 알렉스와 캐서린이 성폭행 신고를 하면 다시는 사교파티에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는데, 기사가 게재된 후 이들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문제의 기사를 쓴 사브리나 루빈 어들리 기자는 재키의 친구 라이언이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며 “빌어먹을 쇼의 일부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재키의 전언을 기사에 실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라이언은 재키와 대화 자체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두번째 쟁점은 사건이 발생한 남학생 사교 클럽이다. 어들리 기자는 사건이 발생한 ‘파이 카파 사이’ 사교클럽의 회장을 취재했다고 주장했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의 증언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어들리 기자는 “사교클럽에서 발생한 집단 성폭행 혐의를 알게 됐다.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해 줄 수 있느냐?”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을 뿐이었다.
세번째 쟁점은 사건을 주도했다고 피해자가 주장하는 안전요원에 대한 것이다. 재키는 안전요원의 성이 아닌 이름만 기자에게 알려줬으며, 가해자가 무척 두렵기 때문에 실명 전체를 밝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자의 계속되는 본명 요청에는 연락 두절로 대응하기도 했다. 기사가 나간 후 조사결과 수영장 안전요원 중 재키가 언급한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사교클럽의 회원도 아니었고 경찰은 그가 성폭행과 연관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편집국 내에서도 초안 검토 과정과 사실 검증 과정이 허점투성이였다. 보고서는 롤링스톤이 내린 가장 중대한 실수는 재키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날에 재키와 대화를 나눈 세 친구를 어들리 기자가 접촉하지 않은 것을 잡지사의 누구도 문제삼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들리 기자의 선임 에디터인 숀 우즈는 결국 그들의 이름을 바꿔 ‘랜달’ ‘신디’‘앤드류’라는 가명으로 기사를 쓰도록 하기까지 했다.
재키를 사교클럽 파티에 데리고 갔던 안전요원의 존재를 끝내 확인하지 못한 것을 수용한 것도 문제였다. 우즈는 초안을 읽고 최소 3번에 걸쳐 안전요원의 정체를 확인하라고 했으나 재키가 연락을 끊자 결국 그들은 어들리 기자가 안전요원을 찾는 것을 그만두는 것을 승인하고 ‘드류’라는 가명을 사용해 기사를 썼다.
기사 작성 자체에서도 문제점이 발견됐다. 롤링스톤은 이야기의 전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과 모르는 내용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다. 가령 롤링스톤은 자신이 ‘드류’의 본명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명확히 하지 않았고, 세 친구 중 ‘랜달’이 재키의 인터뷰를 ‘빌어먹을 쇼’라고 말했다는 부분에서는 이 것이 재키로부터 들은 말임을 확실히 드러내지 않았다.
기사의 정확성을 검토하는 사실 검증부서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검증원의 임무는 기사 초안의 사실여부를 검토하는 것으로 날짜와 같은 세부 사항 등을 이중으로 확인하고 기사에서 묘사된 이야기를 재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검증원은 기자나 편집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경험 많은 기자들이 맡아야 하지만, 대부분 젊은 기자나 대학 졸업생이 이 일을 맡고 있다. 이들은 재키의 기사에 대해 ‘빌어먹을 쇼’라는 인용문구가 재키로부터 나왔다고 써야 한다고 표시했으나, 이 지적은 무시됐다.
롤링스톤의 편집장 윌 다나는 이번 오보사태가 “개인, 절차, 제도 등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실토했다. 그는 “기사가 작성되고 검토하는 모든 단계마다 책임자들은 더 깊이 들어가 의문을 제기할 기회가 있었으나, 누구도 심각하게 문제삼지 않았다”고 반성했다.
이런 자성에도 불구하고 롤링스톤는 이번 대형 오보사태에도 기존 편집 시스템을 혁신할 의도가 없어 보인다. 다나 편집장은 “오보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항상 하는 일을 실수 없이 확실히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는 보도 태도에 대한 명백한 정책이 수립돼야 오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최소한 세가지 영역에서 시스템적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되도록 익명보도를 하지 않되, 익명이 불가피하다면 그 빈도를 훨씬 줄여야 하며 이에 대한 반대와 대안에 대해 철저한 검토 후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정보 확인 과정에서 기자와 편집자들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쓰는 것에 대해 사실 검증 부서가 철저히 제지할 수 있는 권한과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기자는 취재원에게 기사와 관련된 세부 내용을 충분히 제공하고 반론도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들리 기자는 문제의 사교클럽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단순히 ‘코멘트’만을 요청해 구체적인 반박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사실 검증원도 기자와 사교클럽 사이의 대화에만 의존했을 뿐 별도로 사교클럽의 주장을 확인하지 않았다.
이는 ‘재키가 당한 공격’이라는 기사의 주제가 약화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만약 기자와 사실 검증 부서 모두 기사의 주제에 상반되는 세부 사항일지라도 공유돼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숙지했다면 오보는 막을 수 있었다.
롤링스톤이 콜롬비아 언론대학원의 보고서 전문을 게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롤링스톤 기자와 에디터들이 다른 언론과 인터뷰에서 보인 태도를 보면 오보에 대한 보고서의 지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버즈피드는 롤링스톤의 자기 인식에 여전히 문제점이 많다고 비판했다. 취재와 기사 편집과정, 사실 검증 과정 전반에서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롤링스톤이 여전히 ‘재키에게 너무 호의적이었다는 것’이 이번 오보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즈피드는 롤링스톤이 성폭행 피해자를 무조건 믿고 지원하는 것을 오보를 합리화하는 방패로 사용하고 있으며, 재키의 상태를 깊이 신경 쓰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자세히 조사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변명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버즈피는 또 롤링스톤 편집장이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앞으로 더 명백한 취재 가이드라인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바꾸지 않은 점 역시 문제 삼았다.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 안나 노스는 6일자 칼럼에서 성폭행 사건을 기자들이 보도할 때 출처를 명백히 밝히고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며,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보도를 포기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저널리즘의 룰을 포기하는 것임을 콜롬비아 언론대학원의 보고서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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