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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원근법] 이불(二不) 사회

입력
2014.11.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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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개설한 학부 강좌 ‘현대사회론’에서 우리 사회를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과제를 내줬다. 80명에 가까운 수강생들이 가장 많이 응답한 것은 ‘불안사회’(14명)였다. ‘불신사회’(8명), ‘안전불감사회’(2명), ‘소통부재사회’(2명) 등이 뒤를 이었다. 이밖에 ‘암벽사회’, ‘욕망사회’, ‘질식사회’, ‘조롱사회’, ‘숫자사회’, ‘주객전도 사회’ 등 젊은 친구들다운 신선한 발상이 돋보이는 제목도 적지 않았다.

상당수 학생들이 불안과 불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당연함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사회를 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기성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당연한 생각이었다면, 긍정적 접근보다 부정적 해석이 훨씬 더 많다는 게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한윤형씨의 사회비평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불안과 불신의 관계다. 불안이 개인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면, 불신은 개인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삶이 불안하니 타자와 맺는 관계에도 신뢰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역의 논리도 가능하다. 타자와의 관계에 신뢰를 갖기 어려우니 나의 삶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타자를 사회로 바꾸어 써도 좋다. 불안의 정체성과 불신의 사회구조는 청춘들의 눈에 잡힌 우리 사회의 초상이다.

젊은 세대에게 불안과 불신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른바 ‘88만원세대’의 시대는 1997년 외환 위기부터 시작됐다. 힘들게 대학에 들어왔어도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고, 설령 구했더라도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불신과 불안이 우리 사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주장하듯 오늘날의 사회는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선 사냥꾼이 돼야 하는 ‘무한경쟁’ 사회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강조하듯 조직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퇴출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무한공포’ 사회이기도 하다. 나아가 불안과 불신이 청년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구조조정의 압박 아래 놓인 중년세대, 노후 걱정에 우울할 수밖에 없는 고령 세대를 포함해 불안과 불신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불안(不安)과 불신(不信)의 ‘이불(二不)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불안이 성마름을 낳는다면, 불신은 무관심을 낳는다. 성마름과 무관심은 다시 타자에 대한 과도한 증오감과 비정함을 동시에 낳는다.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불안-성마름-증오감’과 ‘불신-무관심-비정함’은 부정하기 어려운 시민문화의 두 코드일지도 모른다.

이불 사회를 가져온 원인은 변화하는 세계에 우리 사회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에 있다. 외환 위기를 빨리 벗어났다 하더라도 위기 극복 이후 기존 발전국가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ㆍ경제구조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문제는 현재보다 미래의 전망이 더 우울하다는 데 있다. 저성장, 빠른 고령화, 낮은 출산율, 활력 잃은 시민사회 등 일련의 지표들은 우리 사회 미래에 새로운 시련을 예고한다. 이웃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유사한 구조로 우리 사회는 성큼 들어서고 있다. 대학 캠퍼스 밖을 나가기 두려운, 오래 사는 게 축복이 아닌 고통을 안겨주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국사회의 일본화’는 이미 시작됐고, 이에 대한 제동 장치를 마련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절정을 이뤘을 때 유행하던 말이 ‘대안은 없다’는 것이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마저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는 현재, 그렇다면 무엇을 새로운 좌표로 삼아야 하는 걸까. 정부-시장-시민사회의 판을 다시 짜야 한다. 일시적 처방으로는 미래 과제는 물론 현재 문제마저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세대를 가로질러 배회하는 불안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무한경쟁과 무한공포의 이불 사회를 다음세대에게 이대로 물려줘서는 안된다. 정치사회든, 언론이든, 지식사회든 기성세대는 문제를 비켜서서 보지 말고 그 핵심을 똑바로 마주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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