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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015, 서울, 트뤼도

입력
2015.11.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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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쥐스탱 트뤼도 열풍이 대단하다. 10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내고 4일 취임한 43세의 젊은 총리 말이다. 10월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자유당이 34석의 소수 야당에서 184석의 다수당(총 338석의 54%)에 등극하는 이변을 달성했을 때 이미 그의 인기는 정점이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캐나다의 존 F 케네디’로 불리는 아버지 피에르 트뤼도 전 총리(1968~79년, 1980~84년 총리 재임)의 후광과, 188㎝의 키에 모델 뺨치는 외모 등 정책 외적인 면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었다.

그런데 취임과 함께 발표한 내각 구성이 또 한번 캐나다 국민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30명의 장관 중 남녀 장관은 정확히 반반인 15명씩이고 30~60대를 아우르는 연령대와 인종적 다양성까지 두루 고려했다. 취임식 후 총리 뒤에 나란히 선 30명의 장관 중에는 원주민 출신의 여성 법무부 장관, 터번을 쓰고 나온 시크교도 국방부 장관,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의 최연소 민주제도부 장관, 그리고 테러범으로 오인돼 수감됐던 인도 이민자, 시각 장애인, 성소수자, 노벨상 수상자, 의사 등등이 포함돼 있다. 역사상 처음인 것이 하도 많아 다 꼽기가 어려운데 따지고 보면 트뤼도 총리가 공언한 “캐나다를 닮은(현재의 캐나다 사회를 반영한)” 내각이 실현된 것이었다. 기자가 “남녀 균형을 맞춘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도 트뤼도 총리의 답변은 단순했다. “2015년이잖아요.”

일각에서는 이러한 내각구성을 두고, 인터넷에 떠돌았던 트뤼도의 상의 벗은 사진처럼 섹시한 쇼맨십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 모양이지만 이 패기만만한 총리가 캐나다 국민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그의 첫 인사는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변화의 열망을 응축하고 있다. 인터넷 댓글에는 한껏 고조된 캐나다 국민들의 자긍심이 넘쳐나고 있다.

과거와의 싸움이라는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 우리로서는 한숨만 나온다. 합리적인 보수 학자들이 교학사 교과서보다 훨씬 질 높은 교과서를 써내서 반대할 명분 없이 많은 학교의 선택을 받는 식이었다면, 이런 학문적 틀 안에서의 싸움이었다면, 역사 교과서 논쟁도 유산과 교훈으로 남는 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에서조차 조롱을 사고 있는 국정화라는 해결책은 결국 다시 되돌리고 말 역사적 뒷걸음질에 가깝다. 역대 대통령에게 다 공과가 있지만 고비마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나아간 점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성장을 일군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 세력을 견제해 군사쿠데타를 걱정하던 시대를 끝냈고, 노무현 대통령 이후로는 지역주의와 권위주의가 크게 완화했다. 하지만 지금 역사 전쟁은 보수층의 집념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대한민국의 과제가 될 수 없다. 성장과 분배(복지)의 균형 찾기라는 시급한 과제를 외면한 채 교과서 전쟁에 올인하다간 우리 사회의 이념적, 정규-비정규직간, 세대간 양극화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해질 것이다. 헬조선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질 것이다.

문제는 2015년 한국에 트뤼도가 없다는 점이다.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 긍정의 힘을 통해 세력화하는 주체가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의 야당은 여당의 문제를 비판하기만 할 뿐 대안을 갖고 중도층을 설득해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대선 이후 복지 이슈마저 여당에 빼앗겼지만 더 앞서나가는 정책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다.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파악하고 풀어나갈 능력이 없으니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화만 남게 마련이다. 비대한 사교육과 망가진 공교육 앞에서 “과외가 금지됐던 전두환 정권 시절이 그립다”는 말이 나오고, 해결 기미가 안 보이는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두고는 “박정희 정권 때 먹고 살 만했다”는 식이다. 2015년 한국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해야 한다. 이제 누가 트뤼도가 될 것인가.

김희원 문화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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