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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원로 “내 미술을 ‘줄임미술’로 불러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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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원로 “내 미술을 ‘줄임미술’로 불러줬으면”

입력
2017.12.19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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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원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

기와ㆍ농기구 등을 닮은 형태로

캔버스 뚫고 파내며 변형시켜

해방을 통해 無의 세계 지향

임충섭 작가의 '무제-녘'(1979). 캔버스 틀을 깎고 캔버스 위에 다양한 오브제를 붙이고 칠했다. 이를 “나와 재료의 해방”이라 불렀다. 현대화랑 제공
임충섭 작가의 '무제-녘'(1979). 캔버스 틀을 깎고 캔버스 위에 다양한 오브제를 붙이고 칠했다. 이를 “나와 재료의 해방”이라 불렀다. 현대화랑 제공

어떤 화가에겐 캔버스가 창작 본능을 발산하는 무한대의 공간일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원로 설치작가 임충섭(75)에겐 감옥이었다. 네모의 감옥에서 벗어나려 캔버스를 괴롭혔다. 캔버스 틀(스트레처)을 깎고 썰었다. 캔버스 한가운데를 뚫고 파냈다. 기름을 바르거나 종이, 가죽, 아크릴판을 붙여 캔버스를 반부조로 만들기도 했다. 작가는 “재료의 해방을 위해 별의별 작업을 넘나들었다”고 했다. 평면의 사각형이라는 캔버스의 정체성에서 탈출한 그는 자유로워졌을까.

작가가 그렇게 그린, 혹은 만든 회화 20점이 처음 세상에 나왔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5년만의 국내 개인전 ‘단색적 사고’에서다. 1973년부터 1983년까지 그린 뒤 작업실에 두고 가끔 꺼내 이리저리 만진 작품이다. 작업 과정을 모르고 보면 흔한 반추상 회화 같지만, 당시 30대였던 작가의 고민과 3차원에의 동경이 캔버스 구석구석 쌓여 있다. 본격적으로 설치미술로 가기 전의 과도기적 작품들이기도 하다.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 미술계라는 좁은 무대도 작가에겐 감옥이었을까. 서울예고, 서울대 미대를 나온 작가는 서울 배재중ㆍ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다 1973년 부인과 딸, 아들을 남겨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93년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육체 노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버텼다. “내가 먹은 맥도날드 햄버거가 수만 개다. 햄버거는 좋은 음식이다. 지금도 좋아한다(웃음).”

임충섭 작가의 변현된 캔버스 시리즈. '무제 - 분청-열림'(2013). 현대화랑 제공
임충섭 작가의 변현된 캔버스 시리즈. '무제 - 분청-열림'(2013). 현대화랑 제공

작가의 대표작인 ‘변형된(Shaped) 캔버스’ 시리즈는 1990년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그림액자 제작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이디어를 얻었다. 기와집 지붕, 농기구, 다듬잇돌, 씨앗, 얼굴 등을 닮은 형태로 캔버스를 과감하게 변형했다. ‘두루마기’ ‘타래’ ‘지붕’ ‘쌀’ ‘처마 ‘콩’ 같은 제목을 달았다. 왜 그런 형태이고 제목일까. 작가의 아버지는 충북 진천 농촌마을의 미곡상이었다. 모든 예술은 그리움에서 나온다고 할 때, 먼 나라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리워한 게 아닐까.

작가는 변형된 캔버스를 흰색 또는 자연을 닮은 색으로 칠한다. 그의 작품이 단색화로 분류되기도 하는 이유다. “흰색은 수만 가지 색을 품은 색이다. 내 작품은 단색화가 아니다. 나는 특정 화파에 예속된 사람이 아니다. 비슷한 작법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예술가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이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것이다.” 요즘 국내 단색화 바람도 꼬집었다. “단색화가 의미를 지니려면 치열한 회화적 수련의 종착점이어야 한다. 단색화를 위한 단색화여선 안 된다. 흰 종이에 점 하나 찍고 그걸 예술이라 해서 되겠나.”

전시엔 변형된 캔버스 근작 10여점이 나왔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건 ‘여백’이다. 지구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에서 40년 간 활동한 작가가 회화, 설치, 영상 작업을 거쳐 도달한 곳이 무(無)의 세계인 셈이다. “예술은 줄임의 마지막 단계다. 내가 개념미술, 미니멀아트를 한다고 하는데 단지 줄임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내 미술을 ‘줄임미술’이라 불러 주면 좋겠다.” 전시는 다음달 7일까지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5년만의 국내 개인전 '단색적 사고'를 여는 임충섭 작가. 최문선 기자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5년만의 국내 개인전 '단색적 사고'를 여는 임충섭 작가. 최문선 기자
'너의 소리를 듣는 나무'(2011) 현대화랑 제공
'너의 소리를 듣는 나무'(2011) 현대화랑 제공
'채식주의자 I, II, III'(2016). 현대화랑 제공
'채식주의자 I, II, III'(2016). 현대화랑 제공
'무제 - 쌉작'(1980) 현대화랑 제공
'무제 - 쌉작'(1980) 현대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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