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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학습된 무기력에 갇힌 청년들

입력
2018.05.08 18:5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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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하다 보면, 가장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청년 유형이 있다. 직장 내 폭력에 노출된 뒤 그 후유증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청년이다. 긴 시간을 함께 해도 매번 나아질 듯 같은 자리를 맴돌곤 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이 이름 붙인 이 현상은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 노출된 경험으로 인해, 실제 자신이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음에도 자포자기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달 국가통계 포털에서 발표한 자료는 충격적이었다. 비경제활동 인구 중 ‘그냥 쉬었음’으로 분류된 사람이 202만명이다. 이들은 일할 능력이 있지만 의사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통계 조사 이후 최고치다. 우리 상담소를 찾은 청년 2만1,492명을 대상으로 자체 조사한 청년마음 통계에서도 유사 현상이 발견됐다. 지난 3년간 취업 관련 고민은 2015년 56.6%에서 2016년 56.1%로, 2017년 55.4%로 해마다 줄고 있다. 딱 감소한 수치만큼 무기력을 호소하는 청년의 숫자가 늘었다. 구직 자체를 단념한 청년들이 증가하면서, 더 이상 취업 ‘고민’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연일 보도되는 대기업 오너들의 갑질 사건을 통해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지만, 청년들은 오래 전부터 경직된 조직을 떠나 ‘대안’을 고민해 왔다. 그중 하나가 스타트업이다. 하지만 동반성장과 상호존중의 가치를 꿈꾸던 그들의 기대는 다시 무너지고 있다.

얼마 전 충격을 준 모 미디어 스타트업의 갑질 사태는 대기업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폭언, 폭행은 물론 여성 직원까지 유흥업소에 강제 참석해 여성 접대부를 ‘초이스’하게 하는 조직문화. 성공한 유명인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동기 부여를 심어 주던 기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대기업을 거쳐,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가 또다시 퇴사를 선택했던 한 내담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말에 쉬고 칼퇴 하고 싶어서 대기업을 그만둔 게 아니다. 그러려면 스타트업에 가지도 않았다. 연봉을 반토막 내고, 주말을 반납할 각오로 그곳을 선택했던 이유는 평등한 눈높이로 일하고, 함께 성장하는 동료로 여겨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지만 이 생태계 또한 다르지 않음을 마주하게 된 청년들은 길을 잃고 만다. 여기에 “다 참고 사는데 너만 유난이냐, 나이도 있고 이제 어쩔 거냐"라는 주변의 언어가 결합하면 마침내 길을 찾는 동력원을 완전히 상실한다. 통계의 ‘그냥 쉬었음’이라는 단어는 태만의 유의어가 아닌, 상처를 떠안고 스스로를 유폐시켜버린 청년들의 슬픈 키워드이다.

최근 4년간 비윤리적 노동 이슈가 불거졌던 스타트업 7개사 가운데 대표자가 사임한 곳은 상술한 단 1곳뿐이다. 심지어 사의를 담은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사태가 잠잠해지자 여전히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렇듯 폭력에 반복 노출된 청년들은 끝없는 자괴감과 자책, 트라우마 속에 심리 질환의 깊은 터널을 걸어간다. 하지만 가해자는 사과문과 자숙의 시간을 잠시 거치면 다시 재기의 레드 카펫을 걷는다.

정부는 올해 중 ‘직장 괴롭힘 종합대책’을 발표하겠다고 지난 2월 밝혔다. 환영할 소식이다. 하지만 제도보다 더욱 촘촘히 갑질 문화를 옥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다. 뜨겁고 폭발적인 관심이 아닌, 차갑고 냉엄하면서도 지속적인 비판의 시선 말이다.

더불어 매력적인 스타트업일지라도 ‘가족 같은 사이라’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았다면 당장 벗어나기를 청년 구직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그리고 잊지 말기 바란다. 기본을 무시하는 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선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가족’이 자행한 폭력의 트라우마는 평생을 지배하는 상처가 된다는 것을.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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