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최문선 기자

등록 : 2017.06.28 04:40

[천운영의 심야 식탁] 환상 속 여인처럼... 달콤함의 정수 '둘세'

등록 : 2017.06.28 04:40

'꿀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달콤한 스페인 디저트. 천운영 제공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천년여왕이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던 만화 주인공 이름과 내 성을 대략 연결해 나온 것으로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저 누가 나더러 천년여왕이라고 부르면 나는 눈을 흘기고, 그러면 또 광선 발사라며 놀리는, 별명을 붙이고 놀리고 발끈하면서 즐거워하던 애들 장난질의 한 부분이었다. 만화는 끝까지 보지 못했고 그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여왕이라는 말은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더랬다.

진짜 여왕의 호칭은 중학교 때 획득했다. 하이틴 로맨스와 할리퀸 시리즈 전권을 모두 섭렵한 존재. 할리퀸의 퀸, ‘할리퀸 천’. 친구들은 만화방에 가기 전에 어떤 책을 빌리면 좋을지 내게 먼저 자문을 구했다. ‘카리브해의 하룻밤’은 야한 장면이 세 번 나와, 하지만 남자가 곱슬머리에 가슴 털이 좀 많아서 별로야, 난 털 많은 남자는 딱 질색이거든.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건 ‘장미의 푸른 가시’야. 매 순간 가시에 찔리는 것 같다니까.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더 에로틱하지. 주인공의 성향에서부터 야한 장면의 강도와 횟수, 궁금한 건 뭐든 다 말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할리퀸 천도 기억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의 이름. 하이틴 로맨스에서 이름이란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구분할 필요도 없고 구분도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할리퀸이 되는데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 진짜 여왕의 면모를 획득한 주인공이 있다. 시인들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묘사하기 위해 부여했던 모든 속성을 다 가지고 있는 미모. 황금빛 머릿결, 넓은 이마, 무지개 같은 눈썹, 반짝이는 눈동자, 장밋빛 두 뺨, 산홋빛 입술, 진주 같은 이, 석고 같은 하얀 목, 대리석 같은 가슴, 상아빛 두선, 눈처럼 하얀 피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는, 전우주의 여왕으로 불리어도 마땅할 여자. 바로 돈키호테의 공주 ‘둘시네아(Dulcinea)’ 되시겠다.

둘시네아는 돈키호테와 산초 다음으로 ‘돈키호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다. 돈키호테가 결투에 나설 때면 축복을 구하며 소리 높여 칭송하고, 승리의 영광을 돌릴 단 하나의 존재. 하지만 단 한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미지의 여자이기도 하다.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여자, 애절한 돈키호테의 부름에도 결코 응답하지 않는 매정한 여자, 애타게 부를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사랑의 블랙홀, 달콤 쌉싸름한 연인의 원조.

스페인 디저트는 '설탕 소름'이 들 정도로 달다. 천운영 제공

그렇게 중요한 둘시네아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달콤하다는 뜻의 스페인어 둘세(Dulce)로부터 파생된 상상 속의 이름이다. 돈키호테가 기사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자신의 이름과 어울리면서도 공주나 귀부인의 이름으로 적합한, 음악적이면서도 신비롭고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를 원하며 생각해 낸 이름. 두말할 것도 없이 둘시네아. 그만한 이름이 어디 있겠는가. 둘세(Dulce). 꿀이나 설탕처럼 단 것도 둘세. 달콤하고 부드럽고 감미롭고 다정하고 순수한 것도 둘세. 맛있는 걸 먹었을 때는 “무이 둘세!(Muy dulce!)”라고 말한다.

스페인 사람들, 단 것 참 좋아한다. 어떤 후식은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다. 아몬드 가루를 꿀로 반죽해 만든 톨레도의 유명한 마사빵(Mazapan)은 두 조각만 먹어도 혈관까지 당분이 전달되는 느낌이 든다.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 꿀에 잰 다음, 우유와 설탕 계란으로 만든 나띠야(Natilla)를 듬뿍 뿌리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까지 얹어 나온 후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설탕 소름이 돋는다. 단것 전문점 둘세리아(dulceria)에 들어가면 꿀 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든다. 짜릿하게 몽롱하다.

둘세는 그런 것이다. 딱 한 입만으로도 온몸을 장악하는 천년여왕의 광선. 그리고 둘시네아는 모든 할리퀸의 이름이다.

소설가

천운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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