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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뿐하던 그때의 생태발자국으로 돌아갈 거야

입력
2017.02.1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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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가 짐 머켈은 한때 잘 나가는 첨단무기 개발자였다. 레이건정부 시절, 스마트한 군사용 컴퓨터를 개발하며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은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1989년 3월 24일이었다. 그날 머켈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로열 바이킹 호텔 바에서 군수산업 거물들과 벨기에 흑맥주를 마셨다. 손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암호처리 알고리즘이 내장된 데다 원자폭탄도 견뎌 낼 만큼 견고한 군사용 컴퓨터 설계를 막 끝낸 참이었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 스위스 군부를 상대로 진행할 세일즈 프레젠테이션을 점검했다. 거래가 성사된다면, 또 한번 눈부신 성취를 맛보게 될 터였다. 혹시 모를 위험요인까지 신중하게 체크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TV를 켰다. 소파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들이켜던 그때, 뉴스 속보가 떴다. 험준한 알래스카 산맥을 배경으로 기름 가득한 바다가 화면에 잡혔다. 시커먼 원유를 뒤집어쓴 가마우지들이 날개를 버둥거리다 죽어 가고 숱한 바다 생물의 사체가 기름띠 사이로 떠올랐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갈매기 몇 마리가 슬프게 울었다. 엑슨 발데즈호 기름유출 사고였다.

출장을 마치고 귀가한 머켈은 일주일 치 식료품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갔다.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들고 가게로 들어서던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손에 들린 바구니부터 집안을 채운 가전제품, 식품 포장재와 온실에서 재배한 채소에 이르기까지…. 화석연료와 관련된 제품으로 포위된 현실을 불현듯 자각한 것이다. 원유로 범벅이 된 가마우지 한 마리가 시리얼 상자에서 튀어나와 우유가 찰랑거리는 그릇 속으로 풍덩 빠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언론은 엑슨 발데즈 선원과 회사 간부들을 상대로 책임을 추궁했지만 잘못은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그는 그 순간 통렬하게 깨달았다.

빈손으로 슈퍼마켓을 나온 그날 이후 머켈의 삶은 달라졌다. 상위 5% 연봉을 받는 군사무기 개발자로서의 이력을 걷어차고, 애지중지하던 고급차를 처분했다. 서재를 가득 채운 경제학 서적을 모두 버린 뒤 지구 환경에 걸맞은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구체화할 자료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거부터 사소한 일상사까지, 전 지구 생명체가 공평하게 살아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매일의 생태발자국 계산법부터 나만의 경제규모 새로 짜기, 자연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비결까지 경쾌하게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고양시킨다. 도회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도 윤리적이며 지속 가능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는 용기와 영감을 얻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일상 전반을 다시 돌아보고 다소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과정이 뒤따르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바람을 구현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틀을 갖춰 가던 나만의 세계가 조금씩 어그러진 건 집에 조카들을 들이면서다. 서울로 대학 간 딸아이를 내게 맡긴 언니가 김치냉장고를 선물했다. 부모님이 상경해 우리 집에 들르신 날, 애잔한 눈길로 세간을 살피고 간 늙은 아버지는 4도어 대형냉장고와 세탁기를 사서 보내셨다. 이후 조카 두 명이 더 합류하면서 단출했던 나의 보금자리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모했다. 혼자 살 때 1만원 안팎이던 전기료가 불과 몇 년 사이 10만원을 훌쩍 넘었다. 간소한 삶이 그리웠지만 20대 초반 조카들에게 내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 조카들이 분가하고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오늘 대청소를 하다가 폭력적으로 푹푹 찍힌 내 생태발자국과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주저앉아 버렸다. 자동차를 포기하고 매일 저녁 손빨래를 다시 하는 일. 아니, 300리터 김치냉장고와 850리터 냉장고에 들어찬 욕망을 150리터 규모로 재조정하는 혁명적 과정이다. 쉽지 않겠지. 다만 한 가지, 지금 바꾸지 않으면 영영 불가능할 거라는 두려움이 나를 옥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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