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록 : 2018.07.05 04:40
수정 : 2018.07.05 09:38

[정민의 다산독본] “가문의 희망이 천주교에…” 충격받은 아버지 ‘밀착 감시’

<18> 의금부에 들킨 명례방집회

등록 : 2018.07.05 04:40
수정 : 2018.07.05 09:38

노름판으로 알고 현장 덮친 포교

푸른 두건 등 낯선 풍경에 당황

명동 김범우 집서 함께 미사보던

이벽ㆍ이승훈ㆍ정약용 형제 등 체포

명문가 자제 많아 곳곳서 아우성

서학책 불태우고 반성 시 쓰고…

“천주교 포기를” 가족들 압박 거세

남인 명문가 자제들 사이에서 천주교는 급히 세를 불려나갔다. 교인들은 중인 김범우의 명례방 집에 모여 미사를 거행했다.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에 1898년 지어진 것이 지금의 명동성당이다. 천주교서울대교구 제공

검거된 종교 집회

1785년 3월, 의금부에 속한 기찰포교들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의 장례원(掌禮院) 앞을 지나고 있었다.그 중 한 집 앞에 유독 신발이 많아 분위기가 수상쩍었다. 포교들은 노름판이 벌어진 것으로 여겼다. 가만히 염탐해 보니 방안의 광경이 사뭇 기괴했다. 수십 명의 사내들이 ‘분면청건(粉面靑巾)’, 즉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고 있었다. 손을 움직이는 동작이 해괴했다. ‘벽위편(闢衛編)’에 나온다.

얼굴에 분은 왜 발랐고, 푸른 두건은 왜 썼을까? 특별히 아랫목 중심에 사려 앉은 사내는 푸른 두건으로 이마를 가리고 어깨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 둘레에 선비 복색의 수십 명이 둘러 앉아 그가 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저마다 책을 들었고, 행하는 예법과 태도는 유가의 사제 간보다 한층 엄격하였다.

투전 판으로 알고 현장을 덮쳤던 기찰포교들이 예상 밖의 낯선 광경에 오히려 당황했다. 현장을 수색하면서 그들은 더 놀랐다. 듣도 보도 못한 서양인의 화상이며 십자가, 수상쩍어 보이는 책자 및 물품들이 압수되었다.

천주를 믿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그 곳은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이었다. 가운데 앉았던 사내는 이벽이었다. 자리에 함께 있던 인물들은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 및 권일신과 그의 둘째 아들 권상문이었다. 권일신의 매부인 이윤하(李潤夏)와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李寵億), 이기양의 외종인 정섭(鄭涉)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들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을 정점으로 하는 남인 명문가의 쟁쟁한 집안 자제들이었다. 중인층도 여럿이 있었다.

이들은 나이를 떠나 이벽에게 깍듯한 스승의 예를 표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벌써 여러 달째 날짜를 정해 모이고 있었다. 날짜를 정해 모였다는 말은 주일을 지켜 미사의 의식을 행했다는 의미다. 이벽이 썼던 푸른 두건은 북경 천주당의 사제들이 미사 때 쓰던 제건(祭巾)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급작스런 보고를 들은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더 놀랐다. 압수해온 물품은 한 눈에도 천주교의 교리 책과 예수의 화상, 그리고 집회 의식에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자칫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한 김화진은 장소를 제공한 중인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방면하는 것으로 이 일을 덮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 조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을사년 추조적발 사건’의 시작이었다.

쉬 가라앉을 것 같던 상황은 예측을 빗겨나 이상하게 돌아갔다. 김화진이 김범우에게 서학을 어째서 믿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서학은 좋은 점이 너무 많은데, 이를 믿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나온다. 그 대답으로 인해 그는 매서운 형벌을 받았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하면서 배교를 재촉해도 김범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확신범이었다. 하지만 형벌은 그에게만 국한되었다.

물건을 돌려주시오

해괴하고 맹랑한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날 방면한 자들이 이튿날 형조로 찾아와 앞서 압수해간 성상(聖像), 즉 예수의 화상을 돌려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던 것이다. 권일신이 앞장을 서고, 이윤하와 이총억, 정섭 등 다섯 사람이 함께 왔다. 이윤하는 성호 이익의 외손자였다. 이때 다산은 동행하지 않았다. 형조판서 김화진이 화를 벌컥 내며 이들의 무모한 행동을 꾸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눈에 뭔가 씐듯했다.

사건 직후 성균관 유생 이용서(李龍舒)와 정서(鄭漵) 등 여러 사람이 연명으로 올린 통문(通文)에 당시 이들이 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들은 형조판서에게 자신들도 김범우와 똑같이 처벌해 달라면서, “다만 원하기는 육신을 속히 버리고 영원히 천당에 오르고 싶을 뿐(惟願速棄形骸, 永上天堂)”이라고 했다. 그들은 다음날도 오고 그 다음날도 또 왔다. 돌려줄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부형이 금해도 듣지 않았고, 벗들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들에게 예수의 화상은 단지 소중한 물건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통문에는 그들뿐 아니라 성균관 유생 중 공부깨나 한다 하는 명성이 있는 자들마저 그들과 동학이라 말하면서 여러 번 글을 올렸다고 적혀있다. 다산을 지칭한 말일 터였다. 다산은 당시 성균관에서 임금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기대주였다.

1784년 4월 15일, 이벽이 다산 형제들을 대상으로 편 첫 선상 포교 이후 이가환, 이익운, 권철신 등 쟁쟁한 남인계 학자들과의 연쇄 토론과 포교 과정을 거치면서, 1784년 말에 천주교는 파죽지세로 신앙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연말 언저리부터 모임을 가지기 시작해, 1785년 3월에는 이들은 푸른 두건과 서책 등 집례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얼굴에 분까지 바른 채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얼굴에 분은 왜 발랐을까? 거룩한 의식에 앞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갖기 위한 정결례(淨潔禮)의 절차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검거 당시 포교들이 목격한 해괴한 손놀림은 성호를 긋는 행동, 사람마다 손에 들었던 책은 미사의 기도문과 순서를 적은 경본이거나 교리서였을 터였다.

발칵 뒤집힌 세 집안

집단으로 모여 집회를 갖다가 의금부에 적발된 일이 알려지자, 이벽과 이승훈, 정약용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들의 부친은 저마다 즉각 강력한 제지 행동에 돌입했다.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이 사학에 깊이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자식들에게 친지의 집을 돌며 제 입으로 사학을 끊겠다는 다짐을 공표하게 했다.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 그는 천주교를 들여왔으나 명례방 집회가 탄로난 뒤 '벽이단'이란 글을 지어야 했다. 탁희승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나아가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은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뜰에서 서학 관련 서적을 불 질렀다. 그것들은 1년 전 자신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구해온 것들이었다. 이때 이동욱은 분서(焚書)의 심경을 담은 7언 율시 두 수를 지었다. 그 시는 남아있지 않다. 아들 이승훈에게도 앞으로 천주교와 결별하겠다는 각오를 담은 벽이단(闢異端)의 시문을 각각 짓게 했다.

당시 이승훈이 썼다는 ‘이단을 물리치다(闢異)’란 시는 이랬다.

하늘과 땅의 윤리, 동과 서로 나눠지니

저문 골짝 무지개다리 구름 속에 가렸구나.

한 심지 심향 피워 책을 함께 불태우고

저 멀리 조묘(潮廟) 보며 문공(文公)께 제 올리리.

天彛地紀限西東(천이지기한서동)

暮壑虹橋晻靄中(모학홍교엄애중)

一炷心香書共火(일주심향서공화)

遙瞻潮廟祭文公(요첨조묘제문공)

시에 담긴 뜻은 이렇다. 한때 무지개다리로 알았던 꿈은 저녁 무렵 구름 노을 속에 잠겨 사라졌다. 애초에 동양과 서양의 윤기(倫紀)란 같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지개다리만 건너면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으려니 나는 믿었다. 이제 미망에서 깨어나 한 심지의 향을 태우며, 나를 미혹케 했던 천주교 관련 책자를 다 불에 사른다. 그런 뒤에 조주(潮州)에 있는 당나라 한유(韓愈)의 사당을 향해 우러러 큰 절을 올리면서 사죄하겠다고 적었다.

한유는 ‘불골표(佛骨表)’를 지어 당나라 때 세력을 떨치던 불교를 이단으로 강력하게 배격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유가 정학(正學)인 유학으로 이단인 불교를 배척하였듯, 자신도 천주교를 버리고 유학으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한 시다. 그는 정말로 배교할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

밀착 감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즉각 상경하여 아들의 거처부터 옮기게 했다. 다산은 1783년 봄 이후 회현방의 누산정사에서 살았다. 이곳이 천주학의 한 온상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적발 사건 직후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종용으로 처가인 회현방의 담재(澹齋)로 이사했다. 장인 홍화보가 1784년 겨울 강계도호부사로 부임해 본가를 비운 터였다.

사건 직후인 1785년 4월에 다산이 지은 시에 ‘담재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주역을 공부하다(陪家君於澹齋講周易)’란 시가 있다. 정재원은 다산을 붙들고 앉아 ‘주역’을 직접 가르쳤다. 일종의 밀착 감시가 시작되었다. 다산이 지은 시 가운데, “성인도 때로는 잘못 있나니, 회린(悔吝)은 밝고 어두움에 말미암는다(聖人時有過, 悔吝由明昏)”고 한 구절이 있다. 회린은 뉘우침과 인색함이다.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흉함이 변해 길함으로 바뀌고, 자만하여 뻗대면 길함은 다시 흉함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회와 린 두 태도는 마음의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를 반영한다.

명례방 집회가 들킨 뒤 다산 또한 종교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아버지 정재원은 아들을 이사시킨 뒤 함께 주역을 읽어나갔다. 공부보다는 감시가 목적이었다. 당시 다산 또한 천주교를 배격한다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어유당전서’에 실려 전한다.

다산의 이 구절은 한 때 자신이 잘못된 길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그 잘못을 깊이 뉘우쳐서 바른 길로 돌아오겠노라고 말한 것이다. 이 또한 이단 배격을 선언한 시였다. 정재원에게 다산은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었다. 그런 그가 삐뚠 길로 가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이때 다산은 정말 천주학을 버렸을까? 그럴 리 없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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