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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산 타며” 기른 체력… ‘도봉순’ 박보영의 실험

입력
2017.03.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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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금토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의 한 장면. 극중 괴력을 지닌 도봉순을 연기하는 박보영은 "(드라마를 찍다 보니)밤길이 두렵지 않다"고 농담했다. JTBC 제공
JTBC 금토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의 한 장면. 극중 괴력을 지닌 도봉순을 연기하는 박보영은 "(드라마를 찍다 보니)밤길이 두렵지 않다"고 농담했다. JTBC 제공

“걸리면 죽어 진짜.” 배우 박보영은 지난 8일 대학생 김윤서씨를 그의 집 근처인 서울 관악구 봉천동까지 데려다 줬다. 귀갓길에 “‘바바리맨’을 자주 만난다”는 김씨를 차 안에서 다독이면서다.

여리디 여린 여배우가 ‘귀갓길 지킴이’로 나선 건 JTBC 화제의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도봉순’)에서 그가 맡은 역할 때문이다. 박보영은 극 중 ‘작은 영웅’으로 나온다. 괴력을 타고나 달리는 자동차를 한 손으로 막아 도로에 쓰러진 사람을 구한다. 드라마 관계자에 따르면 박보영은 24일 방송에서 20명이 넘는 조직폭력배와 맞서 통쾌한 액션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 ‘비트’(1997) 속 임창정의 허세를 지울, 진정한 ‘패싸움 전설’의 등장이다.

순한 얼굴을 한 박보영의 예상치 못한 변신이 흥미롭다. 박보영은 ‘패싸움 장면’을 이틀에 걸쳐 찍었다. “지구력 끝판왕”(박보영 매니저)이란 숨겨진 그의 체력이 큰 몫을 했다. “어려서 산을 좀 탔거든요, 하하하.” 지난 17일 경기 파주시 원방스튜디오. 드라마 기자간담회 직후 한국일보와 만난 박보영이 수줍게 웃으며 농담을 받았다. 충북 증편군에서 태어난 그는 직업 군인인 아버지와 고향에서 산을 자주 올라 체력을 키웠다.

박보영이 ‘도봉순’ 택한 이유

박보영이 맡은 도봉순은 기존의 당찬 영웅 캐릭터와 결이 다르다. 고졸인 도봉순은 번번이 취업 문턱에서 좌절하는 취업 준비생으로, 집에서 밥을 짓는 게 특기다. 힘을 숨기며 살아야 하는 ‘여성 영웅’은 때론 안쓰럽다. ‘능력 있고 힘 세 봐야 사내들 기만 죽일 뿐’이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결과물이다. 도봉순은 억눌린 한국의 여성과 닮아 공감을 주면서도, 보이지 않는 차별에 일격을 날려 대리만족도 선사한다. “생리휴가는 있나요? 없어요? 열악하네요”라며 취업 면접에서 회사 대표를 앞에 두고 당돌하게 불공정 계약 문제를 추궁한다. ‘도봉순’이 종합편성채널(종편) 드라마 중에선 이례적으로 1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몰이인 이유다.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억눌려 보이는 여성”(송원섭 ‘도봉순’ 책임프로듀서)을 원했던 제작진에 박보영은 ‘섭외 1순위’였다. 지난해 상반기에 제작진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박보영은 대본을 보고 ‘아픈 경험’이 떠올라 출연 제안을 받아들였다. 치한을 만나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저앉아 울어버린” 공포에 도봉순 역을 맡아 “대리만족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작용했다.

“데뷔 후 동네에서 낮에 산책하고 있는데 치한을 만나 버스 타고 도망간 적도 있어요. 만약 내게 도봉순 같은 힘이 있으면 ‘그런 식으로 지나치지 않았을 텐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의를 보고)그냥 지나치지 않아도 되니까요.”

‘톰보이’ 고현정ㆍ’알파걸’ 김혜수… 여성 영웅 변천사

‘도봉순’ 처럼 드라마에는 소시민 같은 여성 영웅이 종종 등장했다. 사극을 제외하면 2000년대 후반부터 현대극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문화 흐름에 따라 극 중 여성 영웅들의 모습도 변해왔다.

배우 고현정은 MBC 드라마 ‘히트’(2007)에서 차수경 경위 역을 맡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남자 경찰을 이끌며 강력 범죄를 수사해 불의를 뿌리 뽑는, 국내 최초 여성 강력반장 캐릭터였다. 극중 고현정은 부스스한 머리에 무좀 방지 발가락 양말을 신고 나와 ‘선머슴’을 자처했다. 자장면을 입에 가득 넣고 소리를 지르는 등 거친 모습도 보여줬다. 여성이 남성처럼 옷을 입고 행동하는 ‘톰보이 문화’가 유행하던 시절 나온 캐릭터였다. 전통적인 성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성이 등장했던 시대상의 반영이다.

2010년대 등장한 여성 영웅은 ‘알파걸’이었다. 배우 김혜수는 KBS2 드라마 ‘직장의 신’(2013)에서 남자 부장도 쩔쩔매는 계약직 미스 김으로 ‘을의 반란’을 속 시원하게 보여줘 시청자의 호응을 샀다. 170여 개의 자격증을 딴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를 바탕으로 능숙하게 해외 사업권을 따내며 콧대 높은 남성 정규직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다. 퇴근 후 바에서 라틴 댄스를 추며 여가를 즐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회식은 몸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 테러”란 지론을 품고 계약직을 자처한 그는 일과 일상을 분리해 살 줄 아는, ‘회사원의 영웅’이었다.

멜로 없는 ‘김과장’… 남성 덕에 ‘힘’ 찾는 소극적 여성 영웅

그렇다고 드라마 속 ‘여성 영웅’이 진화한 건 아니다. 남성 영웅과 비교하면 한계가 선명하다. 여성은 전 연인의 죽음(‘히트’ 고현정)을 계기로 의인이 되거나, 옛 사적인 아픔(‘직장의 신’ 김혜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남성의 사례는 그렇지 않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KBS2 드라마 ‘김과장’ 속 김 과장(남궁민)이 ‘영웅’이 된 배경에 ‘사랑 타령’은 없다. 김 과장은 윤하경(남상미) 대리에 잘 보이려고 회사 개혁에 나선 게 아니라, 비리로 얼룩진 회사를 바로 잡겠다는 신념 하나로 움직인다. 친구인 인국두(지수)에 예뻐 보이기 위해 힘을 숨기며 사는 수동적인 도봉순과 달리 적극적이다. 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 영웅은 남성 영웅과 비교해 과거에 얽매이고, 사적인 이유에 많이 좌지우지된다”며 “사회적인 문제에 주체적으로 자각하는 남성 영웅보다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게 아쉬운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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