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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서울여대 '대나무숲 벌목사건'

입력
2015.05.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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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15년. 마을마다 비밀을 털어놓는 대나무숲이 있었다더라. 마을 사람들은 동네에서 맘 놓고 떠들기 힘든 이야기를 그 숲에 대고 털어놓았다. 대나무가 그림자를 만들어주었고, 모두들 안심하고 속얘기를 꺼냈다. 바람을 타고 그 이야기가 전해져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더라.

그런데 어느 날, 한 대나무숲이 죽은 듯 고요한 날이 있었다. 관리가 나타나 ‘특정’ 이야기를 꺼내는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숲에 오면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내쫓겠다 팻말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글을 적어 댓거리를 하며 항의하였으나 관리는 꿈쩍 않고 대나무숲을 ‘성역’으로 지켰다 한다. 고요한, 아주 고요한 성역.

갑자기 왠 우화냐고? 여기서 마을에 대학을 대입하고, 공간을 온라인 커뮤니티, 페이스북 페이지로 옮겨놓아보자. 이 얘긴 서울여대의 익명 제보 페이지, 서울여대 대나무숲에서 있었던 얘기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ㄱ.....헙....
임금님 귀는 당나귀ㄱ.....헙....

● 그런데 대나무숲이 뭔데요?

일단 대나무숲이 뭔지 모르는 분들이 있을테니 설명해보자. 대나무숲.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곳으로 ‘대신 전해드립니다’가 있다. 익명 제보를 받아 페이지에 ‘대신’ 올려준다. 마치 비밀 털어놓는 우화 속 대나무숲처럼 기능한다. 몰래몰래 듣고 널리널리 사람들에게 전한다. 얼마나 많은 대학에 대나무숲이 있냐고? 한양대학교 컴퓨터 전공 허상민 씨가 개발한 대나무숲 관리 페이지에서 ‘대학교 대나무숲’을 검색하면 총 48개의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가 나온다. 한양대학교, 강남대학교를 비롯해 동국대,연세대,고려대,영남대 등 대학 단위별로 개설되어 있다. (페이스북 내 '대나무숲' ▶ 검색결과 보기)

이게 다는 아니고, 이 페이지에서 검색되지 않는 과 단위나, 단과대별 대나무숲 등 다양한 형태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 일례로 중앙대학교를 페이스북에서 검색하면 중앙대학교 대나무숲 뿐만 아니라 중앙대학교 ‘야생의’ 대나무숲, ‘어둠의’ 대나무숲도 뜬다. (중앙대학교 어둠의 대나무숲은 ‘필터링’에 반발한 사람들이 만든 페이지. 중앙대학교 야생의 대나무숲은 이러한 불만을 반영해 기존 중대 대나무숲 관리자측이 만든 곳이다. 중앙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가지 못한 제보들을 모아 올린다.)

슬슬 훑어보면 재밌다. 웬만한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있다. 활발한 축에 드는 곳들을 예로 들면, 연세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의 좋아요 수는 5월 21일 현재 2만, 제보 받은 게시물 수는 3만개를 넘어섰다. 문제가 된 서울여대 대나무숲 페이지는 좋아요 수 4900, 마지막으로 올라온 제보의 번호는 11,440번.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소소한 연애 고민부터 심각한 고민상담, 분실물 찾고, 찾아주고, 동아리 홍보까지. 그야말로 ‘별별’ 얘기가 다 올라온다. 시시콜콜한 잡담과 위로를 나누는 곳이면서, 각 대학에서 ‘핫’한 학내 이슈가 생산되고, 공유되는 곳이기도 하다.

얼마전 서울대학교의 커닝 논란(▶관련기사)은 서울대생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와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서울대 축제 폐막식에서 사회자의 부적절한 언행이 대나무숲 제보를 통해 알려졌고, 대학가의 축제 기간이 끝난 다음에는 축제 운영에 관한 불만들이 올라왔다. 학내 곳곳의 문제가 폭로되는 통로이다. 폭로의 통로일 뿐만 아니라 학내 공동의 이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올라오는 ‘불판’이 될 때도 있다.

대나무숲 관리 사이트 Grouper를 통해 일주일 간 가장 인기 있었던 제보를 검색해보면, 경북대의 경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총장 임용 문제에 관한 게시글이 첫 번째로 뜬다. 연세대학교의 응원단 관련 논란으로 불판이 한 번 만들어졌었다. 중앙대학교 독립언론 잠망경 페이스북 페이지에 21일, ‘대한민국에서 장그래보다 못한 '미스김'으로 산다는 것’이란 제목의 기고글(▶ 직접보기)이 올라왔는데, 이는 중앙대학교 어둠의 대나무숲에 한 학우가 익명으로 제보한 글을 다듬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대나무숲,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미 가장 개인적이고도 공적인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다.

● “왜 제 제보는 안 올라가나요”

이런 공간을 관리자가 멋대로 ‘편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엔 종종 ‘왜 제 제보는 안 올라가나요’하는 하소연이 보인다. 관리자가 편집자다. 자율적으로 생겨난 페이지라 관리방식이 다 다르다. (가령 연세대학교 대나무숲의 경우 관리자 모집 공고를 통해 여러명의 관리자를 선발하고 동아리처럼 운영하고 있지만, 한 명의 관리자가 제보를 선별하고, 올리는 곳도 있다)

나름의 운영 원칙에 따라 제보를 고르고, 특정 인물 또는 학과를 거론하는 비방글과 욕설은 지운다거나 하는 정도다.

제보를 선별해서 올린다는 것이 가장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인데 운영상 한계 탓이 크다. 중앙대학교 대나무숲 관리자는 공지글을 통해 “독자분들의 타임라인을 대나무들이 가득 채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 40분정도에 한 개 꼴로 제보를 올려드리다보니, 필터를 통과한 제보들도 다 올려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고 있다며, “하루에 올려드릴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경북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필터링에 대한 불만, 그리고 관리자의 설명. 필터링에 대한 불만을 반영해 연세대와 중앙대는 올리지 못한 제보를 모아두는 페이지를 만들기도 했다.
경북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필터링에 대한 불만, 그리고 관리자의 설명. 필터링에 대한 불만을 반영해 연세대와 중앙대는 올리지 못한 제보를 모아두는 페이지를 만들기도 했다.

필터링은 편집의 권력. 공론장을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에 대한 권한이 될 수 있다. 논란이 될 주제란 이유로 관리자가 제보를 필터링하면 어떻게 될까? 중앙대학교 대나무숲에서 이사장 관련 글을, 연세대학교에서 응원단 관련 글을 모두 필터링 했다면? 혹은 ‘사실여부’인지 알 수 없다며 서울대 커닝 관련 제보를 모두 필터링 했다면?

● 서울여대 대나무숲 벌목 사건

5월 20일, 서울여대 총학생회 ‘친한친구’는 축제 기간 내 교내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파업중인 청소노동자들의 현수막을 철거했다. (▶ 관련기사)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 대해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이어서 서울여대 대나무숲 페이지에 ‘필터링’에 대한 공지가 떴다.

“서울여대 대나무숲은 현재 일어나는 노동자분들 파업과 총학생회 페북 글이나 댓글 관련 글들에 대하여 어떠한 글도 올리지 않을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현재 이 게시글은 삭제된 상태.
“서울여대 대나무숲은 현재 일어나는 노동자분들 파업과 총학생회 페북 글이나 댓글 관련 글들에 대하여 어떠한 글도 올리지 않을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현재 이 게시글은 삭제된 상태.

반발이 뒤따르자, 서울여대 대나무숲 관리자는 ‘필터링’의 이유를 올렸다. 전반적인 학내 상황을 모르는 학교 밖 사람들의 비난, 욕설이 올라올 것에 대한 우려가 담겨있었다. 그는 “예전에 필터링 기준에도 심하게 논란이 될 만한 글은 올리지 않겠다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심하게 논란이 될 만한 글’. 이 기준은 어디에 있냐하면 관리자의 마음 속에 있었다. 서울여대 대나무숲 관리자는 “한쪽으로 치우친 입장의 글들이 올라오면 학우분들은 혼란에 휩싸이고 선동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제대로 상황을 알지 못하는데 글을 무작위로 올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해명했다. “처음엔 단순 임금문제인 줄 알았던 청소노동자 파업이 민주노총과 연결되어 있고 정치적 문제로 변질되어”갔다는 평가를 먼저 내놓은 뒤의 해명이었다. 숲은 이미 관리자의 것. 숲에서의 ‘혼란’까지도 철저하게 검열하는 대나무숲이 어떻게 대나무숲일 수 있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려고 했더니 대나무숲을 벌목해버리더라는 이야기. 대나무숲이 정치와 비정치를 거르는 ‘필터’를 장착하는 순간부터 그 숲은 대나무숲이 아니다. 공론장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단순히 임금님 변덕으로 생기고 사라지는 곳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허망한가. 대학가의 학내 언론 탄압에, 자치 단위도 많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대학가 이슈에 목소리가 모일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가장 자유롭게, 가장 가깝게 공동체의 불편함을 드러낼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대나무숲’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싸우지마 얘들아. 떠드는 사람 이름 적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얄미운 학급 반장을 보는 느낌이랄까. 대나무숲이란 이름을 떼든가, ‘이 대나무숲은 벌목되었습니다.’라는 공지를 띄우는 게 어떨까. 가장 자유로울 것 같았던 익명의 숲이 이렇게 쉽게 벌목되어 한 이슈를 삼켰다. ‘서울여대 대나무숲 벌목 사건’. 누군가의 변덕으로 우리의 목소리가 쉽게 차단될 수 있다면 그런 ‘필터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저기..이봐...대나무숲이 ‘듣기 싫다’하면 어떡해?
저기..이봐...대나무숲이 ‘듣기 싫다’하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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