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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굴욕이라는 스승

입력
2016.10.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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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흐른다. 관객이 무대에 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어떤 것이다.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는 갈채가, 그렇지 않을 때는 싸늘한 비판이 남는다. 요즘 세상에서는 부정적인 내용이 인터넷에 오랫동안 남을 수 있기 때문에 공연자들이 더 신경을 쓴다.

요 며칠 힘에 부친 일정을 억지로 견뎌냈더니 몸 여러 곳에 탈이 생겼다. 가장 큰 문제는 목소리가 뜻대로 안 나온다는 점이었다. 좋다는 약을 다 써봐도 소용없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데 일정상 그럴 수도 없었다. 노래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객석에서는 실망의 눈빛이 역력했다. 그런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끝없는 자괴감으로 치를 떨었다. 객석의 눈빛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몇몇 일정을 연기했다.

예전에 TV에서 한 여가수가 굴욕적으로 노래하는 장면을 본 적 있다. 그 노래는 듀엣을 했던 남자의 노래였고 노래의 높낮이도 남자가수에 맞춰져 있었다. 평소에 노래 잘하기로 정평이 난 여가수는 그날 눈에 띄는 실수를 했고, 며칠간 시청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실력 있는 가수가 그래서야 하느냐라는 의견과, 뛰어난 가수도 맞지 않는 음높이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맞섰다. 그런 의견들보다 나는 그 가수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의 절망과 새로운 다짐에 대해 생각해봤다. 한동안, 어쩌면 영원히 방송이나 무대에 서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얼마나 비통한 마음에 젖었을까. 아마도 그 차가운 바닥에 내던져진 마음이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 차가운 바닥을 덥혀왔을 것이다. 그 가수의 굴욕이,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엉엉 울며 다짐하는 그 순간이, 완벽한 노래를 만들어가는 도구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며칠 후 TV에서 그 여가수는 이전보다 더욱 멋지게 노래했다. 굴욕이 만든 황홀한 노래였다.

한국 최고의 어느 명창은 말한다. “열 번의 공연 중에 일곱 번은 불만족스럽고, 그중 서너 번은 스스로 참기 힘들 정도다. 일정하게 만족스러운 소리가 안 나온다는 점은 내 평생의 숙제다.” 우리가 보기에 언제나 완벽한 소리를 내는 명창도 속에는 그런 고통이 있다. 수십 년 노래를 불러온 라이브의 황제 가수도 무대에 설 때마다 떨리고, 심지어 어떤 날은 자기가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의 가사도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고 한다. 모든 무대에서 그는 생각한다. ‘오늘은 노래가 잘 되네.’ 혹은 ‘오늘은 왠지 안 되네.’

굴욕은 관객이 주기도 하지만, 더 큰 굴욕은 자기 스스로 주는 것이다. 그것은 ‘나 같은 건 무대에 서면 안 돼.’ 하는 자괴감으로 이어져 한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괴로움을 자기반성과 개선의 시간으로 승화한다면 발전할 것이고, 너무 길게 끌고 가면 자기 재능까지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라이브 공연이란 어쩌면 평소보다 더 나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특별히 모난 부분을 다듬는 리스크 관리 측면이 더 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평소 연습 때의 90% 정도를 내겠다’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무대에서 더 잘하고 싶다면 평소의 실력을 110%, 120% 높여나가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면 좋다. 그리고 어떤 부분들을 희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공연이 있는 며칠 전부터는 말도 아껴야 한다. 무대에 서면, 그간의 희생을 보상받으며 기쁨이 차오른다. 사전 관리에 실패하면 무대에 서는 순간 절망한다.

굴욕을 완전히 멀리하고 살 수는 없다. 굴욕은 우리를 가르치는 혹독한 스승이다. 굴욕을 느끼되, 곁에 오래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잘 사용하면 굴욕은 긍정적인 결과를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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