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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홀대하는 우리 화장품

입력
2016.10.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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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 국내 중저가 스킨 제품

용기 앞면 분석해보니…

294종 중 192종 외국어로만 표기

국산 화장품 용기 앞면에 기재된 외국어 표기들.
국산 화장품 용기 앞면에 기재된 외국어 표기들.

‘에코 테라피 익스트림 모이스처 토닉 위드 에센셜’, ‘루미너스 가디스 오라 퍼퓸 페이스 메이크업 미스트’….

분명 국내 제조사가 생산한 국산 화장품인데 이름은 외국어 일색이다. 제품명뿐 아니라 화장품 포장용기에 기재된 문구에서도 한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본보가 21개 국내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의 스킨(토너 및 미스트 포함) 제품 294 종을 살펴본 결과 포장용기 앞면을 기준으로 외국어로만 표기된 제품이 192종에 달했다. 한글을 병기했더라도 글자 수나 크기로 볼 때 외국어 비중이 더 큰 제품도 86종이나 됐다. 외국어와 한글 비율이 비슷한 경우는 15종, 전체를 한글로만 표기한 제품은 단 하나뿐이었다. 조사 대상 중에는 42종 전 제품의 용기 앞면을 외국어로만 채운 브랜드도 있었다. 이러한 외국어 우대 현상은 스킨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화장품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외국어로 표기된 내용 중에는 한라봉, 유자, 제주 같은 우리말까지 ‘Hallabong’, ‘Yuja’, ‘Jeju’로 기재하거나 어학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신조어 또는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식물의 학명을 원어 그대로 차용해 성분이나 기능을 유추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알 수 없는 외국어 표기가 넘치다 보니 소비자들이 혼란을 겪거나 제품을 오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부 정유진(45ㆍ여)씨는 “70대인 어머니한테 화장품을 사드리고 나서 나중에 가보면 로션과 크림을 뒤바꿔 사용하는 등 엉뚱하게 쓰고 계셔서 속상할 때가 많다. 온통 영어로 뒤덮여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외국어가 생소한 노인들의 경우 아예 판매직원이 1번, 2번 이라고 적힌 스티커를 제품에 붙여서 판매하기도 한다. 뜻 모를 외국어 표기 때문에 곤혹스럽기는 젊은이들도 마찬가지, 대학생 박선영(28ㆍ여)씨는 “인터넷으로 패키지 상품을 샀다가 대혼란을 겪은 후로는 거의 점원의 설명에 의존해 화장품을 구입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우리말 한라봉을 ‘Hallabong’으로 쓰고

한글은 뒷면에 작은 글자로…

소비자 혼란, 오용 사례 많아

현행 화장품법은 제품의 포장에 명칭이나 성분 등을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정확히 표기하되 한자 또는 외국어를 함께 기재할 수 있다고 규정할 뿐 포장용기의 앞 뒷면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제품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앞면은 있어 보이는 외국어로, 눈에 잘 안 띄는 뒷면은 한글로 채우는 꼼수가 통하는 이유다. 외국어 노출이 과도하다는 지적에 대해 한 업체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동일한 제품으로 마케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외국어를 앞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외국어와 우리말 뒤죽박죽 섞인 ‘보그체’

고급스러운 느낌? 불쾌감만 유발!

화장품 판매점의 진열대나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는 외국어 단어와 우리말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국적불명의 홍보문구가 넘쳐난다. 이런 식이다. ‘크리미하고 글로시한 립 텍스처와 매트한 피부 표현의 하모니, 이번 여름 시즌 컨템포러리한 스타일링으로 메이크 오버를 시도하세요’. 이와 같은 표현은 원조가 패션업계라고 해서 외국 패션잡지의 이름을 딴 ‘보그체’라고도 불린다. 업계에선 세련됨의 대명사처럼 쓰고 있지만 정작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반감이 적지 않다. 직장인 변지혜(25ㆍ여)씨는 “차라리 영어로 적혀 있으면 짐작이라도 할 텐데 이런 식으로 섞어 놓으니 뜻이나 느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못 알아들으면 다 소용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대학생 김형규(27ㆍ남)씨는 “고급스러운 느낌보다는 불쾌감만 유발하는 것 같다. 웃기려고 만든 말이라면 대성공이다”라고 꼬집었다.

화장품 제조사들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경우 세세한 느낌 전달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 업체 관계자는 “제품이 지닌 특성과 뉘앙스를 보다 다양하게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외국어나 외래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에는 우리말을 활용한 참신한 네이밍을 선보이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촉촉함을 머금은 쉬어 컬러부터 세미 매트의

비비드한 컬러까지 맞춤 초이스’… 의미 알 수 없고

중고생들 언어교육 부작용 우려도…

화장품 소비계층이 중고생까지 확대되고 있는 만큼 교육적 측면에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최지향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교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국어 해체 현상이 심각한 데다 이런 정체불명의 언어에 학생들이 계속 노출될 경우 올바른 언어구사 능력을 갖추는 데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국립국어원에서 공공언어개선 업무를 맡고 있는 이윤미 학예연구사는 “외국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언어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의사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불필요한 외국어 남용보다 우리말 사용을 자연스럽게 정착할 수 있는 언어문화 조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연구사는 아울러 ‘보그체’를 우리말 표현으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예시 문구를 보내왔다.

‘크리미하고 글로시한 립 텍스처와 매트한 피부 표현의 하모니, 이번 여름 시즌 컨템포러리한 스타일링으로 메이크 오버를 시도하세요’

→‘부드럽고 반짝이는 입술 느낌과 뽀송뽀송한 피부 표현의 조화, 올 여름에 어울리는 멋 내기를 시도해 보세요.’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그래픽=강준구기자 wldms4619@hankookilbo.com

권수진 인턴기자(한양대 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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