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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노동의 구원자 ‘쿠킹박스’ 해먹어봤더니

입력
2016.08.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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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배송돼온 각 쿠킹박스 구성품.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테이스트샵, 프렙, 원파인박스, 프레시지. 강태훈 포토그래퍼
실제 배송돼온 각 쿠킹박스 구성품.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테이스트샵, 프렙, 원파인박스, 프레시지. 강태훈 포토그래퍼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직장인 이고은씨는 요리를 즐겨 하지만 냉장고에 항상 구비하는 것은 간편가정식이다. “혼자 식당에 가서 사먹는 것보다 편하고, 퇴근 후 원하는 메뉴를 곧바로 끓여 순식간에 저녁식사 준비를 마칠 수 있다. 기존 제품처럼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지만 요리하고 남는 재료가 상해서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경제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1인가구 직장인의 라이프스타일에 잘 맞는 데다 요즘 나온 제품들은 맛도 양도 기대 이상이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간편가정식(HMR, Home Meal Replacement)의 부상은 사회, 경제 등 모든 맥락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오늘날 우리는 가사노동이라 불리던 격무를 포기하고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외주화하는 상황에 놓였다. 바쁘기 때문이다. 비단 특정 성별, 특정 연령대만의 일도 아니다. 남녀노소 대부분은 어린이집부터 학교, 직장을 거쳐 노인대학까지 생활을 집 밖에 저당 잡혔다. 집에서 밥을 짓고 있을 사람이 없어졌고, 그 밥을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 점차 심화될 현상이다.

가가호호의 식생활을 도와주는 간편가정식 시장은 작년 1조 7,0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업계에서는 올해 시장 규모를 전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팽창한 3조원 선으로 내다보고 있다. 2013년 출시된 이마트 자체 간편가정식 브랜드인 ‘피코크’ 매출은 첫해 340억원에서 2015년 1,270억원으로 가파른 상승 그래프를 그렸다. 이 브랜드 제품은 현재 600여 종이 출시돼 있다. 홈플러스와 롯데마트 역시 각각 작년부터 ‘싱글즈 프라이드’, ‘요리하다’ 브랜드를 런칭하고 간편가정식 시장에 열 올리고 있다. GS25, 세븐일레븐, CU, 위드미 등 편의점도 도시락에 한껏 힘을 주고 있으며, CJ제일제당, 종가집 등도 간편가정식 제품군 라인업을 확충 중이다.

간편가정식의 부상은 콜럼버스의 달걀, 반전의 경제성이다. 요리는 재료와 기술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과 노동력으로 만들어진다. 시간과 노동력을 할애할 수 있는 구성원이 없는 가정에서는 간편가정식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아쉬운 것은 ‘손맛’뿐인데, 간편가정식은 그마저도 채워준다.

쿠킹박스로 실제 요리해 봤더니 마치 식당에서 사먹는 것 같은 맛이었다.
쿠킹박스로 실제 요리해 봤더니 마치 식당에서 사먹는 것 같은 맛이었다.

요리 욕구와 손맛, 두 마리 토끼 잡다

간편가정식은 다시 세 갈래로 나뉜다. 바로 먹을 수 있는 RTE(Ready to Eat), 데우기만 하면 되는 RTH(Ready to Heat), 요리만 하면 되는 RTC(Ready to Cook)?이다. RTC로 넘어가면 간편가정식 시장은 이미 가정식의 ‘손맛’ 수준을 넘어 전문 요리사가 조리한 레스토랑 맛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 높은 수준의 맛은 유통업계로부터 오지 않는다. 소규모 스타트업으로부터 택배로 온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직장인 정수진씨는 서울 근교 펜션을 예약했다. 3박 4일 휴가를 위해 그가 주문한 것은 ‘쿠킹 박스’다. “이번에는 식상한 바비큐 대신 멋진 요리를 하려고 쿠킹박스를 준비했다. 캠핑을 즐기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알게 됐는데 신세계다.” 평소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랐던 그이지만 레시피에 적힌 것만 그대로 따라 했더니 식당에서 사먹는 것 같은 번듯한 요리가 완성됐다.

‘레시피 박스’라고도 부르는 쿠킹박스에는 요리 레시피와 함께 필요한 재료가 모두 정량으로 준비되어 온다. 한글을 읽을 수 있고 가스 불을 사용할 줄 안다면 누구라도 요리 욕구를 번듯하게 충족할 수 있다. 일일이 장보고 수준에 맞는 조리법을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전문가의 레시피 그대로 요리가 완성된다. 실제로 체험한 쿠킹박스의 요리들은 마치 식당에서 먹는 것 같은 맛을 냈다.

이 맛의 핵심적인 비결은 요리 기술과는 큰 관계가 없다. 가정식과 전문가 주방의 재료 활용 범위와 능력 차이가 핵심이다. 한 끗의 재료 차이가 결과물에서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맛 차이로 크게 갈라진다. 가정에서 요리를 하자면 생략하거나 대체하는 재료가 생기기 마련이다. 일반 소매점이나 대형마트에서조차 구하기 어렵거나, 한 번의 요리를 위해 대량으로 구매하기가 부담스러울 때다. 쿠킹박스에서는 맛을 내는 데 필요한 재료와 소스, 향신료가 빠짐 없이, 아낌 없이 듬뿍 사용된다.

다양한 개성으로 특화된 쿠킹박스

이러한 서비스는 몇 해전부터 소규모로 시도되다가 간편가정식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업체들이 등장해 경쟁을 해나가다 보니 개성도 제 각각이다.

테이스트샵의 삼계 햄프씨드 리조또. 테이스트샵 제공
테이스트샵의 삼계 햄프씨드 리조또. 테이스트샵 제공

테이스트샵(tasteshop.co.kr)은 실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오너 셰프들이 이름을 걸고 메뉴 개발에 참여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김은희, 류태환, 이찬오, 남성렬, 황요한 셰프 등 거물들도 함께 작업했다. “일반 가정에서는 써보지 못한 재료를 사용해 보고, 프로 요리사들의 테크닉을 살짝 시도해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쿠킹 클래스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 3개월 정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요리 실력이 절로 늘게 돼있다.” 김규민 대표는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요리에 대한 판타지를 현실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이 업체는 2014년부터 팝업스토어 등 행사를 통해 오프라인에서 고정 고객을 확보한 후 지난해 12월 정식 오픈했다.

프렙 캠핑 세트 1. 왼쪽부터 삼겹살 볶음 우동, 소이소스 냉 파스타, 버섯이 들어가 담백한 치킨 퀘사디아&토마토 살사. 프렙 제공
프렙 캠핑 세트 1. 왼쪽부터 삼겹살 볶음 우동, 소이소스 냉 파스타, 버섯이 들어가 담백한 치킨 퀘사디아&토마토 살사. 프렙 제공

지난해 12월 런칭한 프렙(prepbox.co.kr)은 2005년부터 도산공원 앞을 지킨 ‘그랑시엘’과 ‘마이 쏭’의 오너셰프 이송희씨의 이름을 내걸었다. 프렙 운영을 도맡고 있는 그의 남편 박근호 대표는 말한다. “처음에는 그랑시엘의 맛을 집에서도 편하게 나눌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이제는 기존 식당 단골들뿐 아니라 그랑시엘에 직접 와보지 않았지만 호기심을 갖고 있던 고객들의 비중도 아주 높다. 레스토랑의 간판 메뉴들을 내걸었다. 맛도 90% 일치한다.” 프렙은 킨포크 스타일의 홈파티를 콘셉트로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캠핑, 운동, 다이어트 등 상황에 맞춘 세트 메뉴도 특화돼 있다.

프레시지의 사천 라즈지. 프레시지 제공
프레시지의 사천 라즈지. 프레시지 제공

올해 7월 정식 오픈한 프레시지(fresh-easy.co.kr)는 타 업체보다 메뉴의 장르가 다양하다. 사천 라즈지, 타이치킨그린커리 등 이색적인 메뉴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특급호텔 재직 중인 셰프와 손잡고 레시피를 개발했다. 중점을 둔 것은 가정에서의 재현 가능성이다. “프로 요리사가 만든 것은 아무래도 가정에서 일반인이 만들 때와는 결과물의 차이가 나게 돼있다. 프로의 레시피를 그대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같은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조리법을 얼마나 최적화하는가가 관건이다. 레시피가 추구하는 맛이 일반인의 손으로도 완벽하게 재현이 되어야 상품성이 있다.” 윤성용 매니저의 설명이다.

원파인박스의 로띠 드 포크. 원파인디너 제공
원파인박스의 로띠 드 포크. 원파인디너 제공

간단한 요리는 10여분만에 완성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면 원파인디너(onefinedinner.com)가 적당하다. 이 업체는 미국, 일본, 스페인, 파키스탄, 인도, 몽골 등 다국적 가정식을 외국인 호스트 또는 유학파 호스트에게 배우고 각각의 음식문화를 공유하는 소셜 플랫폼이다. 텀블벅(tumblbug.com/onefinebox)에서 9월 4일까지 판매되는 원파인디너의 쿠킹박스 ‘원파인박스’는 ‘내 식탁에서 만나는 세계 요리’가 콘셉트다. 첫 제품으로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쿠킹박스를 출시했다. 체험용으로 받아본 프랑스 원파인박스는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도시 디종을 테마로 한 두 가지 요리가 제공됐다. 디종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자를 곁들인 점이 각별하다.

스티로폼 박스 포장에 아이스팩까지 충분히 넣어 냉장 상태로 배송된 네 업체의 쿠킹박스를 풀어 봤다. 재료는 모두 신선했다. 각각 진공포장되거나 지퍼백에 담겨 있었다. 소스나 향신료 등도 운송 중 파손되지 않도록 작은 용기에 잘 담겨 있었다. 레시피는 모두 이해하기 쉬웠고, 지지고 볶고 끓이는 수준 이상으로 어려운 조리 테크닉이 들어가는 것도 없었다. 손이 많이 가는 소스나 장시간 조리가 필요한 부재료는 업체에서 만들어 보내 주는 융통성도 있다. 조리 시간도 간단한 요리는 고작 12분, 가장 복잡했던 것도 70여분(가만히 두고 뭉근히 끓이는 시간이 대부분)이 소요됐을 뿐이다. 레시피와 재료는 모두 2인분 기준으로 표기됐지만 실제 요리를 하고 보니 네 업체 모두 2.5인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넉넉했다. 두고두고 보관할 수 있는 레시피 카드엔 조리 중 훼손되지 않도록 비닐 커버가 씌어져 있을 정도로 이들 쿠킹박스는 번거로움을 줄이고 요리의 즐거움을 배가했다.

단, 공통적인 단점도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대신 포장재 쓰레기가 나오는 것이 한계다. 프렙 박근호 대표는 “운송이나 보관 중 재료가 무르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면서도 친환경적인 종이, 생분해 비닐 포장재 등으로 차차 바꿔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쿠킹박스별 조리시간ㆍ가격

(기준: 2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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