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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자녀는 어디로 출근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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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자녀는 어디로 출근했나요?”

입력
2017.04.2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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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인 27일. 아무런 일도 없을 것만 같은 이날을 미국에선 매우 특별한 날로 여긴다. 1년에 한 번 있는 ‘자녀와 함께 직장에 가는 날(TODASTW·take our daughters and sons to work day)’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수많은 부모들과 회사들은 이날 8~18세 자녀들에게 뜻 깊은 하루를 선사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규과정 외 다른 프로그램으로 수업을 대체하는 자유학기제가 도입되면서 이와 비슷한 ‘부모님 직장체험’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지만, 준비과정이나 운영 면에서 미국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단순한 ‘Career day’가 아니다

미국 아이들에게 이날은 단순한 직업 체험의 날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날 추상적으로만 알았던 부모의 직업을 몸소 체험해보고, 부모가 하는 일과 그 일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일깨운다. 회사를 방문해 체험하는 만큼 한 직장 안에 얼마나 다양한 업무가 있는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를 보면서 직업선택의 폭도 넓힐 수 있다. 행사를 총괄하는 TODASTW 재단은 “아이들이 잠재된 능력을 발견하고, 부모의 역할과 자신의 역할을 이해함으로써 일과 가정의 균형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목적”이라 설명한다.

미국 퍼스트레이디였던 미셸 오바마가 '자녀와 함께 직장에 가는 날'을 맞아 백악관 직원 자녀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미 백악관 공식 유튜브 캡쳐화면
미국 퍼스트레이디였던 미셸 오바마가 '자녀와 함께 직장에 가는 날'을 맞아 백악관 직원 자녀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미 백악관 공식 유튜브 캡쳐화면

미국 퍼스트레이디였던 미셸 오바마는 매년 이날을 살뜰히 챙겼다. 미셸은 아이들에게 백악관 내 파티시에, 공원 경비원, 경찰 등 다양한 직업을 체험하게 한 뒤 “여러분이 체험한 이 모든 게 소중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 일을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미셸은 “여러분의 부모는 백악관에서 굉장한 일을 한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가끔 집에 늦게 들어오기도 하고, 여러분의 숙제 등을 놓치기도 한다”라며 “이 같은 상황은 여러분에게 버거울 수도 있고, 때론 짜증이 날 수도 있다”라고 타이른다. 이어 “하지만 부모님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미국이 잘 굴러가고 있고, 그들 덕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는다”라고 덧붙였다. 또 “여러분이 학교에서 자신의 일들을 잘 해내는 것은 부모님을 돕는 것이며, 이는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추켜세운다.

‘견학’ 아닌 ‘체험’에 더 방점

우리나라 대부분의 ‘직장체험’은 무늬만 ‘체험’일 뿐 실제로는 ‘견학’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부모가 다니는 회사를 방문해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부모가 일하는 책상에 한 번 앉아본 뒤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전부다. 하지만 TODASTW는 다르다. 무조건 ‘체험’이 1순위다. 직장을 ‘방문’만 하는 게 아니라 해당 회사 구성원들이 하는 다양한 일을 직접 체험해보고, 아이들이 실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돕는다.

'자녀와 함께 직장에 가는 날'을 맞아 미국 NBC 방송사에 초대된 아이들이 스튜디오 체험을 하고 있다. 유투브 캡쳐화면
'자녀와 함께 직장에 가는 날'을 맞아 미국 NBC 방송사에 초대된 아이들이 스튜디오 체험을 하고 있다. 유투브 캡쳐화면

보다 나은 ‘체험’을 위한 매뉴얼도 구체적으로 갖추고 있다. 매뉴얼은 직업에 따라 나뉜다. 부모님이 회사에 다니거나, 교직원, 프리랜서, 식당 근무자일 경우 등이다. 일반 회사에 다닌다면 그 안에서도 회계, 마케팅, 인사, 홍보, 온라인 팀 등 부서별로 어떤 이벤트를 하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주부라면 굳이 특정 장소에 가지 않아도 된다. 대신 매뉴얼은 아이에게 점심, 저녁 준비하는 일과 세탁ㆍ청소 등을 돕게 한 뒤, 이 일의 의미와 화폐가치로 따지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다른 직업과 비교하며 알려줄 것을 추천하기도 한다.

TODASTW 재단이 제시한 스케줄 샘플. 이는 일반 회사에서 TODASTW 일정을 꾸릴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오늘 할 일을 설명해주고, 해당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해준 뒤 오후에는 본격적인 워크숍을 시작한다. 워크숍은 각 부서별 특성에 따라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달리해 진행된다. TODASTW 재단 제공
TODASTW 재단이 제시한 스케줄 샘플. 이는 일반 회사에서 TODASTW 일정을 꾸릴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오늘 할 일을 설명해주고, 해당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해준 뒤 오후에는 본격적인 워크숍을 시작한다. 워크숍은 각 부서별 특성에 따라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달리해 진행된다. TODASTW 재단 제공

아이들은 이날의 경험을 다음날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공유한다. TODASTW가 특정 날짜나 주말이 아닌 ‘목요일’인 것도 이 때문이다. 목요일에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을 다음날 곧장 다른 아이들과 공유하고, 이를 수업시간에 적용하며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아이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나누다 보면,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주먹구구식 우리나라 ‘직업체험’

우리나라도 자유학기제가 도입되면서 ‘부모님 직업체험’이 한창 인기를 올렸지만 최근엔 다소 주춤한 모양새다. 미국처럼 정해진 날이 없는데다 학교마다 일정도 제 각각이라 기업의 입장에서도 번거로운 일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부모가 바쁘다는 이유로 직업체험을 대신 주선해주는 업체들도 암암리에 성행하는 등 편법까지 넘치는 실정이다.

체험에 대한 매뉴얼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한꺼번에 여러 명의 아이들을 한 명의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부지기수다 보니 체험은 뒷전이고 아이들 환심 사기에 급급하다. “지난번 OO아빠는 비싼 점심을 사줬는데, 이번에 △△아빠는 라면만 사주더라”는 입소문이 돌기도 해 부모들끼리 경쟁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 일부 학교에서는 부모님 직책, 연봉 등 체험의 취지와는 상관없는 정보까지 지나치게 자세하게 요구해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정연 경기도교육연구원 박사는 “아직은 직장체험이란 게 견학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회사에서도 관련 프로그램 등이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부담스러워 하는 게 현실”이라며 “이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선 정부가 정책적으로 나서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적극적인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령 직업체험에 참여하는 기관이나 기업에 세제혜택을 주거나, 아예 미국처럼 특정일을 정해 그날은 오전만 근무하고 오후엔 직업체험을 위한 시간으로 꾸밀 수 있게 지원해주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은령 한양대 교수는 “우리나라에선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직업의 귀천에 대한 편견이 있어 다양한 직업을 체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라며 “아무리 전도유망한 직업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해도 소위 말하는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아니면 학부모들이 거절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현 교수는 “정말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본 아이들은 각각의 노동이 가지는 가치를 알기 때문에 나중에 커서도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부모가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실직하는 등으로 ‘직업체험’을 할 수 없는 경우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미국에선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을 그룹으로 묶거나, 자신이 관심 있는 기관에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일부 기업이 신청을 받아 직장 체험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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