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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영령’과 군인묘지 ‘전몰자’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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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영령’과 군인묘지 ‘전몰자’는 다르다

입력
2017.01.2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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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입구. 일본 우익은 전몰자 위령비, 일종의 현충원 같은 곳인데 왜 참배할 수 없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 시설은 '전몰자'가 아니라 '영령'을 모시는 공간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야스쿠니 신사 입구. 일본 우익은 전몰자 위령비, 일종의 현충원 같은 곳인데 왜 참배할 수 없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 시설은 '전몰자'가 아니라 '영령'을 모시는 공간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야스쿠니 해체하기

아키코 다케나카 지음

하와이대출판부 발행

전지구적 기억공간에서 1월 27일이 갖는 의미는 사뭇 엄중하다. 1945년 이날 나치 최대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가 소련 적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아우슈비츠의 해방 60돌인 2005년 유엔총회의 결의로 1월 27일은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국제기념일’로 선포되었다. 이날은 그래서 홀로코스트가 유대민족의 경계를 넘어 초국가적 기억으로 전화되었음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으로 눈을 돌리면 1월 27일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나름대로 엄중하다. 1874년 이날 메이지 천황이 예고도 없이 ‘동경 초혼사(招魂寺)’를 첫 방문하고는 토바-후시미 전투(1868)에서 도쿠가와 막부군과 싸우다 숨진 천황파 전사자들을 ‘추도’하고 ‘현창’한 것이다. 이 방문을 계기로 사가 반란, 대만정벌, 강화도 침공 등의 과정에서 숨진 정부군 병사들의 혼을 불러 안치하는 의례가 공식화되면서, ‘야스쿠니 문제’가 시작된 셈이다.

죽은 자의 ‘영’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데 ‘초혼사’든 ‘야스쿠니’든 무슨 차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세와 근대의 차이처럼 양자의 차이는 엄연하다. 적이든 아군이든 전사자들을 함께 장례 지내고 그 죽음의 터에 모두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던 중세의 종교적 관행 대신 ‘국가와 민족’ 혹은 ‘천황’을 위해 죽은 자들만을 기리는 까칠한 근대의 죽음의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은 판이한 것이다. 1868년 아이주 전투의 뒤처리 과정에서 보듯이, 천황에 반대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위해 죽은 자들은 국가적 의례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들이 개인적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동경 초혼사’가 야스쿠니 신사로 개명한 1879년 6월 4일은 근대적 죽음의 정치가 메이지 일본에서 공인된 날이기도 했다. 이로써 전사자를 기리는 주체는 유가족이 아니라 공적 영역의 국가로 바뀌었다. 전사자의 죽음도 슬픔으로 ‘애도(哀悼)’하기보다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한 공적을 ‘현창(顯彰)’하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으로부터 전사자를 떼어 놓고 국가가 기억의 주체가 되어 죽음을 동원하고 제도화하는 근대 일본의 기억의 터이자, 국가의 정치·종교적 신념이며, 동아시아의 문제가 된 야스쿠니의 시발이다.

그렇다 해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야스쿠니 신사가 처음부터 ‘호국영령’의 ‘성소’였던 것은 아니다. 19세기말 야스쿠니 신사는 ‘성소’이기보다는 ‘명소’였다. 전사자를 기리는 마쓰리 축제 동안 야스쿠니는 서커스, 경마, 씨름 등을 즐기는 유람인파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도심 정비 사업으로 아사쿠사 등에서 쫓겨난 잡상인들과 무허가 예능인들이 몰리면서 야스쿠니 신사는 잡상인과 오락의 메카가 되었다. 야스쿠니 경내에서 벌어지는 질 낮은 공연과 높은 입장료에 대한 불만들은 야스쿠니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인식을 잘 드러내준다.

저작에 따르면 죽음을 동원하고 제도화하려는 권력의 의도에 맞게 야스쿠니가 본격적인 ‘성소’가 된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였다. 1894년 한 해에만 야스쿠니 박물관인 ‘유우슈우칸(遊就館)’ 방문객 수가 전년 대비 7배로 급증했고, 러일전쟁기인 1904-05년 연간에는 모금액이 전년 대비 배 이상으로 껑충 뛰었다. 승리한 전쟁이 삼삼한 스펙터클로 소비되었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국가의 수호신으로 신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산업화와 더불어 급속히 진행된 도시화가 가족의 유대관계를 해체하자, 가족을 대신해서 국가가 자연스레 전사자를 추념하는 주체가 되었다.

특기할 만한 일은 1907년 ‘영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야스쿠니의 명부에 기재된 전사자는 ‘영령’으로 불리는 순간 이들은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수한 영혼으로 승화되고, 모든 죄를 사면 받고 정화된 영혼이 되는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의 한 원인은 바로 이 과정에서 전범행위가 이미 정화되어버렸다고 간주한다는 점이다. 야스쿠니가 전사자 숭배의 터인 보통의 국립묘지나 전사자 묘지와 다른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야스쿠니의 ‘영령’과 군인묘지의 ‘전몰자’ 사이 이 간극을 직시할 때, 자민당 소속 역대 일본 수상들의 야스쿠니 참배가 왜 문제인지 더 명쾌하게 드러날 것이다. 야스쿠니와 관련해서는 ‘위령’과 ‘영령’의 차이 외에도 ‘애도’‘추도’‘현창’ 사이의 개념적 간극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위령’‘애도’‘추도’가 일반적인 전사자 숭배의 중심이라면 ‘영령’과 ‘현창’이라는 개념이 야스쿠니의 문제인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핵심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전후 일본사회의 기억의 문제를 야스쿠니 문제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밑으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죽음을 동원하고 제도화하는 국가권력의 의도가 민중들에게 그대로 먹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다카시 데쓰야의 ‘야스쿠니 문제’가 야스쿠니를 만든 권력의 의도가 그대로 먹힌다고 전제한다는 저자의 비판은 ‘밑으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을 취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비판이 더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아시아 차원의 초국가적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정국’교나 쿤밍의 ‘정국’ 소학교에서 ‘정국(靖國)’의 일본어 발음이 ‘야스쿠니’인 걸 설명하는 과제는 아직도 미해결이다.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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