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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칼럼] 비리 오너 풀어주면 투자 늘까

입력
2014.09.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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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세 장관들 재벌 총수 가석방 군불

투자ㆍ고용 확대 기대는 희망일 뿐

유전무죄 국민적 위화감 조성 우려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바통을 이어받듯 재벌 총수 사면ㆍ가석방 얘기를 꺼냈다. 황 장관이 “구속된 기업 총수가 경제 살리기에 헌신할 땐 기회를 줄 수도 있다”고 하자 다음날 최 부총리는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화답했다. 황 장관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친분이 있고 최 부총리는 박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냥 나온 말이라고 넘기기에는 미심쩍다.

시점도 공교롭다. 박 대통령이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는 중에 나왔다. 파장이 커지자 청와대는 “사면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으나 대통령의 해외 방문 시기를 활용했다는 의심이 든다. 청와대와 교감 없이 핵심 장관들이 민감한 문제를 거론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두 장관은 비리 기업인 선처 명분으로 경제 살리기를 들었다. “오너가 없어 투자와 고용 의사 결정을 못하고 있다”는 재계의 주장과 판박이다.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로서는 지푸라기가 아닌 동아줄로 보일 만도 하다. 투자와 가석방을 놓고 정부와 재계가 흥정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한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수감된 재벌 총수들을 풀어주면 투자와 고용이 늘기는 할까. 과거의 경험을 보면 그렇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고 기업들의 요구를 죄다 들어줬다. 그러나 늘어난 건 투자와 고용이 아니라 재벌들의 곳간이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대기업의 현금보유액은 2배 이상 늘었다. 경제활성화는 뒷전이고 돈을 쌓아 놓기에 바빴다. 이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재벌들이 과실만 따먹고 투자를 외면했다”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대기업이 투자와 고용에 소극적인 것은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수익이 예상되는 곳에 돈을 쏟아 부을 뿐이다. 오너가 수감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투자와 고용에서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비리 오너들에게 선처를 베풀면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하려 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생색내기 이상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도 분명하다. 고용도 마찬가지다. 경기가 좋아질 전망이 있어야 채용을 늘리지 무턱대고 뽑지는 않는다. 대기업의 시설 투자가 직접적인 고용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된 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비리 재벌 총수들에게는 ‘3ㆍ5법칙’이란 게 있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정찰제 판결이다. 아무리 거액을 빼돌리고 회사에 손해를 끼쳐도 ‘경영공백 우려’와 ‘국가경제 기여’등의 이유로 면죄부를 줬다. 멀쩡하다가도 검찰이나 법정에 출두할 때면 앰뷸런스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는 재벌 총수들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쓴 웃음을 짓게 했다. 몇 달 전까지 구속집행 정지로 병원에 입원해있던 한 재벌 회장은 며칠 전 건강한 모습으로 아시안게임 승마경기에서 메달을 딴 아들과 함께 나타나기도 했다.

지난 대선에서야 비로소 비리 재벌 총수들에 대한 봐주기 관행을 끊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사법부의 엄정 판결에 대기업에도 이젠 불법ㆍ탈법 경영이 발붙이기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는 어렵사리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재벌 무관용 원칙을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대선에서 “대기업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는 엄격하게 제한하겠다”고 공약했고 당선자 시절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에 “부정부패나 비리 연루자 사면은 국민을 분노케 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런 기조에서 정부는 지난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가석방심사위원회를 통과했는데도 불허 결정을 내렸다. 당시 법무부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지도층 인사에 대해서는 가석방을 불허하기로 했다. 그 동안 일정 집행률을 충족하면 당연히 석방되는 걸로 인식해왔지만 이젠 새로운 가석방 정책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남은 게 재벌 총수 사면 배제다. 이제 그마저도 흐지부지 될 상황에 직면했다. 국민들 입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탄식이 다시 나오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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