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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10년간 슈퍼마켓서 일하며 쓴 SF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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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10년간 슈퍼마켓서 일하며 쓴 SF 소설

입력
2018.04.27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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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초현실주의 작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리는 손'(1948)을 모티프로 그린 '에셔의 손' 표지. 허블 제공
네덜란드 초현실주의 작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리는 손'(1948)을 모티프로 그린 '에셔의 손' 표지. 허블 제공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삶’이 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 고통의 기억을 모조리 걷어내고 삶을 리셋할 수 있다면. 그렇게 초기화한 ‘나’는 여전히 ‘나’인가. 그런 상상과 사유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지난해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받은 김백상(41) 작가의 ‘에셔의 손’이다.

먼저 저자 이야기부터. 7개월 차 소설가인 김 작가의 삶은 그야말로 소설 같다. 10년 전 그에게 소설이 왔다. 이야기를 짓고 싶다는 신열을 앓았다. 생사를 오가는 선친의 입원실 보호자 침대에서 200자 원고지 550장짜리 소설을 토해내듯 썼다. 열흘 만이었다. 태어나 처음 써 본 소설이 문예지 공모 최종심까지 갔다. 다시 읽어보니 부끄러웠다. 부끄럽지 않은 문장을 쓰는 것, 그의 다음 목표였다. 서강대 경영학과를 나와 ‘번듯한’ 일자리를 찾지 않고 경기 동두천 슈퍼마켓에 취업했다. 글 쓸 시간만 충분하면 먹고 살 돈은 충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별빛에 매료된 청년이 무작정 우주로 뛰어들듯 나는 소설에 몸을 던졌다.” 그렇게 10년 간 소설 한 편을 써냈다. 생애 두 번째로 완성한 소설, ‘에셔의 손’이다. 그는 요즘도 슈퍼마켓에서 일한다.

직경 5.56㎜, 길이 45㎜. M16과 K2 소총에 쓰는 총알 크기다. 예비군 훈련 중 김 작가의 뇌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숫자,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이다. 내 뇌에 저장된 기억이 나의 것이라면, 왜 마음대로 불러낼 수 없는가. 주체적인 것은 나인가, 기억인가. 그런 의문을 품고 ‘기억’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김백상 작가는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책 내는 데 사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스튜디오에 가서 찍은 사진이에요”라고 했다. 허블 제공
김백상 작가는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책 내는 데 사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스튜디오에 가서 찍은 사진이에요”라고 했다. 허블 제공

소설은 ‘전뇌’라 부르는 인공 뇌를 컴퓨터 메모리처럼 갈아 끼우는 시대의 이야기다. 진은 기억을 지워 주는 사람이다. 인간의 운영체제인 언어∙사고∙행동 기억만 남기고 뇌를 포맷한다. 상처받은 이들은 “너절한 삶과 극단적 죽음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 없이” 새출발한다. 진은 그들의 기억을 자기 기억과 동기화해 ‘미래의 알타미라 동굴’ 같은 곳에 기록해 둔다. 진이 그런 능력을 갖게 된 건, 국가 기간시설을 공격한 ‘일곱 사도의 테러’가 일어난 직후였다. “이것은 개벽. 섭리의 섭리다. 우리는 그의 일곱 사도다”라고 쓴 전자 메모가 유일한 단서인 테러 사건을 따라가는 과정이 소설의 줄기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육사의 시 ‘광야’, 네덜란드 초현실주의 작가 모리츠 코리넬리스 에셔의 석판화 ‘그리는 손’ 등이 모티프로 등장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에셔의 손

김백상 지음

허블 발행∙408쪽∙1만3,500원

김 작가는 ‘SF 키드’가 아니었다. 26일 전화로 만난 그는 “등단한 뒤 유명한 SF 작가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분들이 쓴 작품들을 잘 몰라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여느 SF 소설과 작법과 정서가 다르다. ‘첨단의 미래’를 그리는 데 별로 공 들이지 않았다. 김 작가가 만든 인물들은 오히려 아날로그를 그리워한다. 기계 몸으로 갈아 입은 인간이 기름진 치킨 맛에 황홀해하고, 홀로그램 격투기장엔 영화 ‘스타워즈’의 주제가가 깔린다. “추측 보도만 일삼는”, 여전히 무기력한 모습이긴 하지만 신문도 살아 남는다.

김 작가는 ‘문장’에 한껏 힘을 줬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작정한 듯한 묘사가 빽빽하게 등장한다. 그는 “소설 완성에 시간이 많이 걸린 건 울림이 남는 문장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스타일의 문학성을 높이 살지, 숨 돌릴 곳이 없다고 느낄지, 독자의 평이 갈릴 것 같다. 김 작가는 “SF만 쓸 생각은 없다. 순문학에 가까운 소설을 차기작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책은 ‘잘 나가는’ 과학 전문 출판사 동아시아의 과학문학 브랜드 허블이 낸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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