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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성완종 사태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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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성완종 사태의 대가

입력
2015.05.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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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과거 제국주의 식민 지배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해 분명한 사과 없이 미국에만 고개를 숙이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 아베 총리는 29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의 무대에 섰다. 상원의장인 조 바이든 부통령(왼쪽)과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듣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의회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과거 제국주의 식민 지배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해 분명한 사과 없이 미국에만 고개를 숙이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 아베 총리는 29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의 무대에 섰다. 상원의장인 조 바이든 부통령(왼쪽)과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듣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가 ‘성완종 리스트’ 와 함께 ‘성완종 특사’ 의혹까지 진상을 규명하도록 지시한 대통령 메시지를 발표해 병상통치 논란이 불거진 지난달 28일 미국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존 케리 국무장관이 자기 집을 그에게 개방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와 링컨 기념관을 방문했다. 주요 언론은 미국 성전인 링컨 기념관에서 두 정상이 같은 방향으로 손을 뻗은 채 담소하는 사진을 실었다. 태평양을 가운데 놓고 진행된, 서로 다른 풍경을 보면서 팽팽하던 끈이 느슨해진 느낌이 들었다. 멀리 미일이 동맹전략의 새 판을 짜는 때에 서울의 정치권이 선거용 묘수나 찾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국을 사이에 놓고 한일이 벌인 과거사 논란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느낌이었다.

엊그제 재미교포 선배기자와 언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다시 들었다. 유엔 현장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언론인이라 그의 생생한 얘기를 전화로 듣곤 했다. 그가 일본이 유엔에 제출한 문건을 보고 흥분한 것 같았다. 아베 총리가 유엔고문방지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를 냈는데 도무지 틀린 내용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강제동원 기록이 없고 보상까지 했다는 데 한국이 무슨 논리로 국제사회를 설득할 거냐는 말도 그는 했다. 영문으로 읽은 일본의 보고서에 그가 먼저 설득 당한 게 분명했다. 아베 총리가 누군가. 2007년 1차 집권 때부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역사 수정을 기도해온 장본인 아닌가. 얘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일찍 사과 이메일을 보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유엔고문방지위에 낸 보고서를 보고 만일 국제 심포지엄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섰을 때 어느 측이 더 참석자들을 설득할 수 있나 생각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작년과 다르게 유엔도 분위기가 달라져 ‘코리아 퍼티그’(한국 피로증)란 말이 대놓고 나오고 있다.” 유엔 무대조차 점점 과거사에 갇혀 있는 한국에 지치고 힘들어 한다는 얘기다.

한국 피로증을 유발한 아베 총리는 왜곡된 과거사로 왜곡된 애국심을 부추기는 우파 정치인에 불과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렇게 쉽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잃어버린 20년 속에 자신감마저 상실한 자국민을 움직일 줄 알고, 국익을 정면에 내세우는 냉철한 지도자다. 2004년 방미한 아베 당시 자민당 간사장은 “일본 국익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람들을 매파라 한다면 나도 그리 불리기 바란다”고 말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13년에는 “강한 일본을 되찾겠다”고 선언해 미국에 ‘저팬 컴백’을 알렸고, 이번 방미에서 보란 듯이 미국의 아시아 전략을 떠맡아 미일 신밀월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미국은 국익에 따라 상황변경을 하는데 거부감이 없다. “미국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거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솔직히 내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된 싸움에 관심이 없다.” 지난 3월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와 관계 정상화 선언을 하며 던진 말에서, 우정이니 동맹이니 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보수 논객 팻 부캐넌은 이런 오바마 대통령에게 “상황에 따라 우정을 버리는 게 미국 실용주의 전통”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수만명이 희생당한 지 20년도 안 되어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것도 미국이다. 한국을 강타하는 엔저 공습이 미일 신동맹의 경제 버전이라는 지적처럼, 양국 신 밀월에 한국의 국익도 시험대에 올라서 있다. 어쩌면 과거사의 진실 지키기와 국익이 충돌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책략이 급해진 때 한국 사회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회장이 쳐놓은 올무에 갇혀 망자와의 진실게임에 빠져 있다. ‘성완종 리스트’를 통해 드러난 돈과 권력의 결탁 문제를 풀기 위해 또 얼마의 시간과 사회적 공력을 쏟아 부어야 할지 모른다. 성완종 파문의 대가가 클 것 같다.

이태규 사회부장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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