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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거야" 뻣뻣한 아빠의 뻣뻣한 교육법

입력
2015.03.2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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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 아들

‘뭐? 비키라고? 풉. 어쩌다 만들어진 소리겠지….’ - 이 아빠 혼자 생각

(잠시 후 다시)“비~켜~, 비~이~껴~”- 아들

어쩌다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이 아빠한테 하는 말이었다. 입으론 저 소리를 만들어 내면서 손으론 책상의자에 앉은 아빠를 미는, 정확한 의도를 갖고 하는 말이었다. 이전까지 지껄이던 소리라고 해봐야 ‘이게 뭐야?’정도였고, 아는 물건이 시야에 들어오면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 이름을 반복해서 외치던 수준의 녀석이….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놈이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게 됐을까. 아들을 사이에 눕혀 재우고 아내와 지난 시간들을 복기했다. 이 아빠 기억으로는 쓴 기억이 거의 없는 단어이고, 적어도 아들이 듣는 데서 사용한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엄마가 의심된다’고 하자 아내가 펄쩍 뛰었다. 더더욱 그런 말을 쓸 일이 없고, 아들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알지 엄마가 어떻게 알겠냐며 화살을 돌렸다.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아들이 그 단어를 구사한 상황을 보면 그냥 넘기기엔 좀 아까웠다. 말문이 트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기를, 의사소통이 돼서 징징대거나 떼쓰는 시간이 줄길 바라는 마당에 가르치지도 않은 말을 이토록 정확하게 사용하다니! 그 습득 과정을 되짚으면 말을 익히는 훌륭한 방법이 되겠다 싶었다.

어린이집에서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배운 새로운 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말도 경험이 동반될 때 빠르고 정확하게 습득하는구나 싶다. 사진은 혼자 놀던 아들이 종종 보는 누나와 어울려 노는 모습. 저들끼리 부대끼면서 아빠가 알려주는 것보다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배운 새로운 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말도 경험이 동반될 때 빠르고 정확하게 습득하는구나 싶다. 사진은 혼자 놀던 아들이 종종 보는 누나와 어울려 노는 모습. 저들끼리 부대끼면서 아빠가 알려주는 것보다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19개월 된 아들이 언제 어떻게 저 말을 배웠을까. 아내와 거의 동시에 어린이집을 지목했다. 3월초부터 다니기 시작한, 머무는 시간 그리 길지 않지만 100%의 출석률로 나가고 있는 곳이다. 특히 만 2세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고, 말 잘하는 형 누나들과 같이 놀면서 자연스럽게 익혔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봤다. 아니나 다를까 담임선생님은 언어발달 과정상 모방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때그때 “비켜줄래~”로 잡아주고 있다고 했다. 추측이 맞았던 셈이다.

형 누나들을 따라 하는 것도 따라 하는 것이지만, 우리 부부는 말뿐만이 아니라 체험, 경험이 동반됐기에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다는 자체 결론에 도달했다. 누군가가 비켜라는 소리와 함께 아들을 밀었고, 밀린 아들이 ‘비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했으며, 자신의 말로 만든 아들이 제 아빠에게도 적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적지 않은 후회가 든다. 이 아빠가 지난 육아휴직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했구나 하는 아쉬움이다. 아들이 딴 건 몰라도 말을 조금 더 빨리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틈나는 대로 설명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말을 익히는 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가령 아들에게 “여기서 저리로 가고 싶은데 그 길목에 다른 친구가 앉아 있으면 ‘비켜줄래’라고 하는 거야”하고 설명하는 식이었다. ‘애들한텐 자꾸 말을 걸어줘야 한다. 대꾸를 해줘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이 아빠도 별 생각 없이 말만 많이 해줬을 뿐, 말과 함께 거기에 맞는 몸짓은 해 보이지 못했고, 체험은 시키지 않았다.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 우리 부자가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은 확연히 늘었다. 하지만 아들이 어린이집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예전처럼 온종일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 친구들이 더 좋아지는 때가 오면 아빠랑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더욱 드물어질 것이다.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 우리 부자가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은 확연히 늘었다. 하지만 아들이 어린이집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예전처럼 온종일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 친구들이 더 좋아지는 때가 오면 아빠랑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더욱 드물어질 것이다.

비교적 또렷하게 구사하는 말에는 ‘비켜’만 있는 건 아니다. 헤어질 때 살짝 펼친 손을 돌리며(흔들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소리로 내는 ‘아안(녕)’하는 인사말도 있다. 이 역시 “친구랑 헤어질 땐 이렇게 손을 흔들면서 ‘안녕~’ 하는 거야”라며 이 아빠가 수 없이 설명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것도 이럴게 아니라 아들이 보는 데서 사람들 만나고 헤어질 때 이 아빠가 더 큰 목소리로, 더 큰 몸동작으로 반갑게 인사 나눴더라면, 그래서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설명하면 알아듣겠지 하는 착각과 욕심이 컸다.

상대와의 관계를 막론하고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아들 보기가 뭣해 얼마 전부턴 다른 인사를 가르쳤다. “00(아들)보다 큰 사람한테는 이렇게 허리를 숙이고 ‘안녕히 계세요’ 하는 거야” 하는 식이다. 설명과 강요(?)가 반복된 덕분인지 최근엔 손을 흔들며 인사 하다가도 고개를 앞뒤로 까딱거리면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각도는 영 시원찮다. 아파트 청소하는 아주머니, 경비 아저씨, 요구르트 아줌마, 길다가 만나는 이웃들, 어린이집 선생님들한테 이 아빠가 고개를 ‘까딱’거리는 딱 그 만큼이다.

아이들이 어른들 모습 비추는 거울이라더니, 아들을 통해 이 아빠의 뻣뻣한 모습을 확인한다.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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