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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트럼프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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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트럼프 게임

입력
2018.06.05 11:02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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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기의 하루는 평상시의 1년과도 같다는 말이 있다. 2018년의 5월만큼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지난 5월23일 한미정상회담과 그 직후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싱가포르 북미회담 취소발표, 그리고 26일 전격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이르는 ‘운명의 나흘’이었다. 궤도를 잠시 이탈한 듯 보이던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열차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른바 ‘주말 번개 회담’을 계기로 다시 싱가포르를 향한 여정을 재개했다.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인 김영철은 며칠 전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김영철과의 면담을 끝낸 트럼프의 첫 마디는 북미 정상회담을 예정대로 개최한다는 발표였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아직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믿지 않는 분위기가 더 강한 모양이다. 김정은 이전 시대의 북한과 협상에 나섰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특사나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관점에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들의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거나 단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시샘 때문 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의 처지에서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따져 본다고 생각해 보자. 상황을 아주 단순화하면 북한이 CVID를 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 각각에 대해 미국이 그에 상응하는 CVIG(체제보장)를 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의 네 가지 시나리오가 나온다.

먼저 미국이 CVIG를 보장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 북한은 CVID를 하는 것이 이득일까, 하지 않는 것이 이득일까? 애초 북한의 의도는 CVID와 CVIG를 맞바꾸는 것이었으므로 CVID를 하는 것이 이득이다. 혹시 북한이 미국을 속이고 몇 기의 핵무기를 어딘가에 몰래 숨겨둔다면 어떻게 될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1차적인 이유는 미국의 선제 핵공격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완전히 보장하는 상황이라면 숨겨둔 핵무기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다. 더구나 겉으로는 CVID를 이행한 상황이므로 “우리에게 핵무기가 있으니 우리를 핵공격하면 우리도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이른바 상호확증파괴에 의한 공포의 균형도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각되었을 때 미국과 국제사회의 보복에 대한 우려가 더 클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CVIG를 보장하는 경우 북한은 CVID를 이행하는 게 이득이다.

미국이 북한을 기만하고 CVIG를 보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이때는 북한이 CVID를 이행했을 때 미국의 위협에 맞설 수단이 없게 된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을 기만하고 핵무기를 다 폐기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그러니까 북한으로서는 CVID를 했을 경우 미국의 배신에 따른 피해를 걱정해야 하고, 기만적으로 핵무기를 숨겼을 경우 발각에 따른 보복을 걱정해야 한다. 만약 북한이 발각의 우려를 떨쳐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미국의 배신에 따른 체제위협을 상쇄시킬 수 있는 이점이 훨씬 우세하므로 기만적으로 핵무기를 숨기는 것이 이득이다. 갈루치 전 특사가 우려하는 대목도 이 지점이다. 북한이 작심하고 핵무기를 숨긴다면 그걸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발각의 우려만 없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숨기는 것이 무조건 이득인데 왜 CVID를 하겠는가, 이런 이유로 미국 여론은 북미 협상을 대체로 비관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미국은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 어차피 CVID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좇아 북한과는 절대 협상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제재와 압박을 계속 유지하거나, 아니면 쉽지 않더라도 끝까지 CVID를 관철시켜 미 본토에 대한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워싱턴의 기존 외교 프로토콜은 전자를 따르라고 하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허리를 맞대고 있는 우리는 미국과 똑같은 처지가 아니다. 아무리 CVID가 어렵더라도, 설령 북한의 속내가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그 의심까지 계산에 넣고 한반도 비핵화와 냉전종식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북한이 체제보장에 대한 확신을 가져, 발각의 우려를 안고 핵무기를 숨기기보다 완전한 비핵화의 길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비핵화를 향한 북한의 약속과 진정성이 어떤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할 것인가, 북한이 가질 법한 기만의 유혹을 어떻게 얼마나 제거할 것인가 등의 결코 쉽지 않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아마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영철 부위원장과 만난 뒤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지난한 과정의 시작일 뿐이라고 한 것도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우리의 절박함과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이번 게임의 실마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트럼프 본인이 자신의 셈법을 이제 확신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 확신이 역사적인 12일 회담의 성공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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