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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삼성이 버린 것, 삼성이 얻은 것

입력
2014.11.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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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이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 등 화학·방산 계열 4개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한다고 공식 결정한 지난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에서 직원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관계사들은 이사회 혹은 경영위원회를 열고 삼성테크윈 지분 32.4%를 8,400억원에 한화로, 삼성종합화학 지분 57.6%를 1조 600억원에 한화케미칼 및 한화에너지로 매각하기로 결의했다. 뉴시스
삼성그룹이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 등 화학·방산 계열 4개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한다고 공식 결정한 지난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에서 직원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관계사들은 이사회 혹은 경영위원회를 열고 삼성테크윈 지분 32.4%를 8,400억원에 한화로, 삼성종합화학 지분 57.6%를 1조 600억원에 한화케미칼 및 한화에너지로 매각하기로 결의했다. 뉴시스

삼성과 한화의 '빅딜' 뉴스를 접했을 때 먼저 눈길이 간 건, 사기로 한 쪽(한화)보다 팔기로 한 쪽(삼성)이었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1조9,000억 원을 쏜 한화의 통 큰 베팅도 놀라웠지만, 삼성이 오랜 기간 공들여왔던 사업(방산ㆍ석유화학)을 통째로 넘긴다는 것 자체가 더 흥미로웠다.

사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접는 문화’가 무척 희박하다. 진입이 있으면 퇴출도 있고, 시작하는 사업이 있으면 그만두는 사업도 있기 마련이지만 대기업들은 유독 버리는 데 인색했다. 경영이란 끊임없는 취사선택의 과정인데도, 취(取)만 있었지 사(捨)는 거의 없었다. 수십 개 업종과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선단이 된 것, 형제끼리 분가하거나 자금난에 쪼들리지 않는 한 절대로 영위 사업이 줄어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삼성도 그랬다. 1991년 한솔그룹과 신세계그룹, 1993년 CJ그룹 등 형제간 계열분리를 제외하면, 또 소규모 합작을 청산하거나 ‘맛보기’ 수준의 사업을 정리한 걸 제외하면, 이건희 회장 체제 출범 이래 주요 사업에서 손을 뗀 건 자동차, 유통,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자발적 사업 철수는 더 드물었다. 만약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삼성은 현재까지도 르노삼성차를 끌어안고 있었을지 모른다. 가정에 입각해 결과를 예단해선 안되겠지만 국내외 시장판도를 볼 때 적어도 자동차에선 반도체나 휴대폰과 같은 ‘삼성 신화’는 힘들었을 것이다.

MRO는 정부 압력에 못 이겨 포기한 케이스다. 삼성은 2011년 중소기업과 골목상권 보호를 앞세운 이명박 정부의 상생협력 공세가 거세지자, 그룹 내 각종 소모성자재를 일괄 구매하며 상당 규모의 흑자를 내던 아이마켓코리아를 아예 팔아버렸다. 같은 이유로 정리한 빵집까지는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유통은 자발적으로 물러난 거의 유일한 경우다. 삼성은 신세계백화점이 분가한 후 유통업에 꽤 강한 공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백화점(분당 삼성플라자ㆍ현 AK플라자)과 대형마트(홈플러스)에 차례로 뛰어들었지만, 더 키우는 것도 그렇다고 접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다 결국 10여 년 만에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재벌그룹들이, 그리고 삼성이 이처럼 진입보다 철수를 몇 배나 주저하는 건 오너체제와 무관치 않다. 대기업들이 대형 신규사업에 진출할 때 최종 의사결정은 거의 100% 오너에 의해 이뤄진다. 기업에선 신규 투자사업 중 10~20% 살아 남아도 대성공이지만, 그냥 사업이 아니라 ‘오너의 작품’이 되다 보니 실적이 부진해도, 전망이 어두워도, 심지어 실패가 확실해 보여도 실무진들은 섣불리 접자는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사업만 경직된 게 아니다. 삼성은 이미 시장에서 십 수년 전 사망선고를 받은 문서작성프로그램 ‘훈민정음’을 버리지 못하고 여태 끌고 오다 지난 9월에서야 비로소 MS워드로 교체했을 정도다. 경이적 신화를 창조해낸 삼성이지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닫힌 단면도 많았음을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삼성의 4개 계열사 일괄매각은 전례 없는 의사결정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방산도 석유화학도 모두 고 이병철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의 결심으로 시작됐을 텐데, 그룹 내에서 꽤 비중 있는 사업군을 이렇게 통째로 정리하는 건 가히 파격이었다. 이건희 회장 부재상황이라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재용 부회장이 부친과 조부의 사업을 처분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번 M&A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재벌간 빅딜, 금전적 대형빅딜 차원이 아닌 새 체제를 맞은 삼성의 대변화라는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서라면 오너가 선택한 것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철저한 비즈니스 원칙이 비로소 작동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고 있는 삼성 앞엔 많은 도전이 놓여있다. 시장경쟁은 말할 것도 없고, 환경 노동 통상 내부규율 등 모든 분야에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요구에 직면할 것이다. 해답은 결국 변화인데,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이번 M&A를 통해 삼성은 더 많은 걸 얻었다고 본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한다’는 21년 전의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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