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한화의 '빅딜' 뉴스를 접했을 때 먼저 눈길이 간 건, 사기로 한 쪽(한화)보다 팔기로 한 쪽(삼성)이었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1조9,000억 원을 쏜 한화의 통 큰 베팅도 놀라웠지만, 삼성이 오랜 기간 공들여왔던 사업(방산ㆍ석유화학)을 통째로 넘긴다는 것 자체가 더 흥미로웠다.
사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접는 문화’가 무척 희박하다. 진입이 있으면 퇴출도 있고, 시작하는 사업이 있으면 그만두는 사업도 있기 마련이지만 대기업들은 유독 버리는 데 인색했다. 경영이란 끊임없는 취사선택의 과정인데도, 취(取)만 있었지 사(捨)는 거의 없었다. 수십 개 업종과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선단이 된 것, 형제끼리 분가하거나 자금난에 쪼들리지 않는 한 절대로 영위 사업이 줄어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삼성도 그랬다. 1991년 한솔그룹과 신세계그룹, 1993년 CJ그룹 등 형제간 계열분리를 제외하면, 또 소규모 합작을 청산하거나 ‘맛보기’ 수준의 사업을 정리한 걸 제외하면, 이건희 회장 체제 출범 이래 주요 사업에서 손을 뗀 건 자동차, 유통,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자발적 사업 철수는 더 드물었다. 만약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삼성은 현재까지도 르노삼성차를 끌어안고 있었을지 모른다. 가정에 입각해 결과를 예단해선 안되겠지만 국내외 시장판도를 볼 때 적어도 자동차에선 반도체나 휴대폰과 같은 ‘삼성 신화’는 힘들었을 것이다.
MRO는 정부 압력에 못 이겨 포기한 케이스다. 삼성은 2011년 중소기업과 골목상권 보호를 앞세운 이명박 정부의 상생협력 공세가 거세지자, 그룹 내 각종 소모성자재를 일괄 구매하며 상당 규모의 흑자를 내던 아이마켓코리아를 아예 팔아버렸다. 같은 이유로 정리한 빵집까지는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유통은 자발적으로 물러난 거의 유일한 경우다. 삼성은 신세계백화점이 분가한 후 유통업에 꽤 강한 공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백화점(분당 삼성플라자ㆍ현 AK플라자)과 대형마트(홈플러스)에 차례로 뛰어들었지만, 더 키우는 것도 그렇다고 접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다 결국 10여 년 만에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재벌그룹들이, 그리고 삼성이 이처럼 진입보다 철수를 몇 배나 주저하는 건 오너체제와 무관치 않다. 대기업들이 대형 신규사업에 진출할 때 최종 의사결정은 거의 100% 오너에 의해 이뤄진다. 기업에선 신규 투자사업 중 10~20% 살아 남아도 대성공이지만, 그냥 사업이 아니라 ‘오너의 작품’이 되다 보니 실적이 부진해도, 전망이 어두워도, 심지어 실패가 확실해 보여도 실무진들은 섣불리 접자는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사업만 경직된 게 아니다. 삼성은 이미 시장에서 십 수년 전 사망선고를 받은 문서작성프로그램 ‘훈민정음’을 버리지 못하고 여태 끌고 오다 지난 9월에서야 비로소 MS워드로 교체했을 정도다. 경이적 신화를 창조해낸 삼성이지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닫힌 단면도 많았음을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삼성의 4개 계열사 일괄매각은 전례 없는 의사결정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방산도 석유화학도 모두 고 이병철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의 결심으로 시작됐을 텐데, 그룹 내에서 꽤 비중 있는 사업군을 이렇게 통째로 정리하는 건 가히 파격이었다. 이건희 회장 부재상황이라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재용 부회장이 부친과 조부의 사업을 처분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번 M&A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재벌간 빅딜, 금전적 대형빅딜 차원이 아닌 새 체제를 맞은 삼성의 대변화라는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서라면 오너가 선택한 것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철저한 비즈니스 원칙이 비로소 작동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고 있는 삼성 앞엔 많은 도전이 놓여있다. 시장경쟁은 말할 것도 없고, 환경 노동 통상 내부규율 등 모든 분야에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요구에 직면할 것이다. 해답은 결국 변화인데,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이번 M&A를 통해 삼성은 더 많은 걸 얻었다고 본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한다’는 21년 전의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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