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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등록 : 2017.11.28 15:35

[이정모 칼럼] 답은 지문 안에 있다

등록 : 2017.11.28 15:35

만약 지난 5월이 아니라 오는 12월 20일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상태일까? 11월 15일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바로 그 다음 날 예정대로 수능을 치렀을까? 원래 수능 예정일에 규모 3.6의 여진이 발생했는데 이때 학생들은 시험을 포기하고 뛰쳐나왔을까? 포항의 수험생들은 올해 수능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다행히 대통령 선거를 지난 5월에 치렀고, 바뀐 정부는 수능연기를 신속히 결정했으며, 정부를 신뢰하는 국민은 그 결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일주일 연기된 수능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수능 진행을 지켜봤다. 다행히 연기된 수능일에는 큰 여진이 없었으며 수능은 무사히 끝났다.

수능이 끝나면 가끔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살펴보곤 하는데 이번에는 국어 문제를 살펴봤다. 하도 언론이 요란하게 보도하고 페이스 북에도 이런저런 말이 오갔기 때문이다. 대체로 “너무 어렵다”, “도대체 이런 게 왜 국어 시험에 나오냐”, “전문가들도 맞추기 어렵다” 같은 이야기였다.

실제로 1980년대에 내가 치른 시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 교과서에서 지문이 나왔고 문학 파트에서만 교과서 바깥에서 지문이 실렸다. 주로 여기에서 상위권과 중위권이 구분되었다. 그 많은 문학 작품 가운데 어느 게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방법은 평소에 많이 읽어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고3 때는 여기서 점수를 잃었지만 재수할 때는 다 맞출 수 있었다. 순전히 지금은 사라진 ‘삼중당 문고’ 덕분이다. 재수 시절엔 단 하루도 삼중당 문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국어에서 더 좋은 점수를 얻는 데 대해 사람들은 별 불만이 없었던 것 같다. 하긴, 그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에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수능 1교시에 치러지는 요즘 국어 시험 문항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화법, 작문, 문법이 각각 5문항씩 출제되고 이어서 비문학 독서와 문학이 15문항씩 출제된다. 성적 차이는 대부분 비문학 독서 문항에서 갈린다. 지문이 길고 문학과 달리 내용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에는 지문 한 개가 시험지 한 면의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길었다. 주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 ‘환율과 금리, 통화량의 관계’(경제), ‘디지털통신 시스템에서의 부호화’(기술)로 생소하고 난해했다.

대부분의 불만은 경제와 기술 관련 문제에 집중되었다. 경제 지문은 환율과 주가 같은 경제 변수가 단기간에 오르거나 내리는 현상을 말하는 오버슈팅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내게도 생소했으니 아직 고등학생인 친구들에게는 매우 낯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답은 지문 안에 다 있었다. 개별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 맥락 안에서 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배경지식이 있으면 유리하겠지만 없다고 해서 못 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모 신문에서는 한국은행의 한 직원이 13분의 시간을 들여 문제를 풀었지만 여섯 개 문항 중 두 개를 틀렸다고 보도했다. 수능에 지나치게 어려운 지문과 문항이 아니냐는 뉘앙스였다. 풉! 국어 시험은 배경지식을 얼마나 갖췄는지를 묻지 않는다. 수험생의 문해력(文解力)을 파악할 뿐이다. 답은 지문 안에 다 있다. 게다가 한국은행 직원이라면 독해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배경지식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은행 직원이 못 푼 것은 그 사람의 문해력과 지식의 문제이지, 시험문제가 과도하게 어렵기 때문은 아니다.

디지털통신 시스템의 부호화에 관한 지문도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과 학생보다는 문과 학생들에게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과 학생이라고 해서 ‘채널 부호화’와 ‘선 부호화’ 같은 개념을 배운 적은 없을 것이다. 나도 처음 듣는 말이다. 기술 지문은 문과, 이과 구분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어렵다. 하지만 경제 문제와 마찬가지로 지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역시 답은 지문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말이 있다. 어떤 글이라도 백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시험 시간이 그다지 충분하지 않아서 백 번은커녕 두 번 읽을 틈도 없다는 것이다. 국어 시험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문해력, 즉 한 번 읽고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이 읽는 글은 단순히 문학만 있는 게 아니라 사용설명서도 있고 철학과 예술에서 과학과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다양하다. 대상에 따라 글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평소에 많이 읽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자녀들이 수능 점수를 잘 받기 원한다면 문학뿐만 아니라 교양 과학책을 많이 읽히시라. 올해 수능은 이래저래 칭찬 받을 일이 많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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