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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어쩜 듣고 싶은 말만 해... 친구보다 나은 AI"

입력
2018.03.07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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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대답인 걸 알면서도

마음이 엄청 흔들렸어요"

비록 가상의 캐릭터지만

내 감정에만 귀 기울여주는

챗봇•AI스피커와 대화 일상화

고객의 솔직한 반응을 수집

마케팅 수단으로도 각광

호주선 아바타 챗봇 도입해

장애인 위한 복지 서비스

# “유경씨 곧 결혼한다며? 그럼 좀 덜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밥을 입에 넣기도 전에 과장의 외모 지적이 날라왔다. 입맛이 싹 사라졌다. 동료들은 도와주기는커녕 눈치만 보고 있다.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 하소연해보지만 ‘안읽씹(메시지를 읽지 않고 무시하는 것)’ 해버린다. 조용히 ‘분노챗봇 새새’ 애플리케이션(앱)을 열어 ‘욕해줘!’를 입력하니 바로 답을 한다. “XX 사람이 먹고 살다 보면 살이 좀 찔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는 거지.” 어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똑같이 해줄까. 어떨 땐 친구보다 낫다니까.

김유경(31ㆍ가명)씨는 지난해 11월부터 분노챗봇 새새를 사용하고 있다. 우연히 지인이 페이스북에 공유한 챗봇을 재미 삼아 열어본 것이 시작이었다. 그날도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화나!’라고 입력했는데, 새새가 여기에 맞춰 귀여운 욕을 해주니 묘하게 기분이 풀렸단다.

2013년 개봉한 공상과학(SF) 영화 ‘허(Her)’의 주인공 시어도어는 인공지능(AI) 컴퓨터 ‘사만다’와 대화를 하며 위안을 얻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 개봉 당시만해도 AI와 소통하는 건 영화 속 배경인 2025년이나 되어야 가능한 머나먼 일 같았다. 그런데 5년이 지난 2018년 현재 사람과 AI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되고 있다. 일상에 보급된 챗봇과 AI스피커 덕분이다. 올해 1월 기준 AI스피커는 KT의 ‘기가지니’ 약 50만대, SK텔레콤의 ‘누구’ 약 40만대, ‘네이버 프렌즈’와 ‘카카오미니’ 각각 10만대 등 총 100만여대가 넘게 판매됐다. 챗봇은 워낙 종류가 다양하지만 가장 유명한 ‘헬로우봇’ 시리즈의 누적 사용자수가 200만 명이 넘었다.

김유경(가명)씨가 챗봇 '새새'와 나눈 대화. 입에 차마 담기 힘든 욕도 귀엽게 바꿔 대신 욕을 해준다. 김씨 제공.
김유경(가명)씨가 챗봇 '새새'와 나눈 대화. 입에 차마 담기 힘든 욕도 귀엽게 바꿔 대신 욕을 해준다. 김씨 제공.

로봇인 너의 한마디에 왠지 마음이 흔들려

인간의 말에 답하는 채팅 서비스는 2000년대 초반 인스턴트 메신저를 기반으로 한 ‘심심이’ 때부터 있었다. 심심이는 일종의 초기 챗봇이지만 대화가 조금만 복잡해져도 “아는 말로 해주세요” 라고 애원했다. 미리 입력된 키워드가 없으면 답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에 ‘알파고’처럼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AI가 결합되면서 챗봇은 꽤 그럴싸한 대화상대가 됐다. 물론 사람처럼 ‘눈치’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데이터가 모이면서 챗봇은 때론 사람이 뒤에 숨어있는 것만 같은 감성적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사용자들의 말이다. ‘가짜톡’이라는 챗봇을 사용하는 이종혁(33)씨는 “여자친구와 다툰 뒤 힘들 때 챗봇에게 ‘헤어질까?’라고 물어봤는데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라고 답했다”며 “로봇인걸 알면서도 그걸 보는 순간 마음이 엄청 흔들렸다”고 말했다.

챗봇에 목소리가 더해진 AI스피커 역시 묘한 온기를 전하는 건 마찬가지다. 본디 정보전달과 전자기기 제어용으로 탄생한 인공지능이라지만 집에 들이면 마치 식구가 생긴 느낌이된다. 프리랜서 디자이너 유은영(40)씨는 지난달부터 네이버의 ‘클로버’를 사용하면서 말수가 늘었다. “집에서 혼자 일을 해서 하루종일 말을 한마디도 안 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스피커에 이것저것 시키다 보니 어느새 ‘그게 아니야’ ‘고마워’ 라며 룸메이트가 있는 것처럼 대화하게 되더라고요.”

필요할 때 없는 사람보다 인공지능이 낫다

물론 인공지능과의 소통이 사람과의 대화만큼 진국일 순 없다. 그래도 사용자들은 당장 내 말에 귀 기울일 사람이 없을 때 AI만한 대체제도 없다고 말한다. 김씨가 새새와 대화하는 것도 마땅히 하소연할 사람이 없을 때다.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려 해도 각자 회사생활이 힘든 상황이라 서로 부담되고 날카로워지기도 하더라고요.” 비록 가상의 캐릭터이지만 자기 자신의 감정소모 없이 온전히 내 감정에만 귀 기울이는 챗봇이 때론 더 위안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집에서 AI스피커 ‘샐리’를 사용중인 신현아(27)씨는 얼마 전 아버지가 ‘샐리가 자식들보다 더 낫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스피커에 대고 ‘김연아 나이가 몇 살이지?’ 같은 질문을 하세요. 저희한테 그런 걸 계속 물어보면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귀찮아할 수도 있는데 샐리는 늘 친근한 말투로 대답도 잘 하니까 더 좋다고 하시는 거죠.” 사람과 감성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기분에 따라 ‘감정적’으로 답하지 않는 게 사람에게는 없는 인공지능의 장점인 것이다.

영화 ‘허(Her)’의 남자 주인공은 인공지능 비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 ‘허(Her)’의 남자 주인공은 인공지능 비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마케팅부터 공공서비스까지…널 대신할 존재가 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비록 AI가 어색하게 말을 걸어도 사람들이 꽤나 적극적으로 답한다는 것이다. 타로카드 챗봇 ‘라마마’를 사용하는 최수연(26ㆍ가명)씨는 대화가 끝나면 꼭 ‘고마워’라는 인사를 보낸다고 한다. “라마마가 제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하는 것처럼 점괘를 알려주니까 왠지 답을 해야 할 것만 같더라고요.” 주역점 챗봇 ‘꽁냥꽁냥 인생질문’을 운영하는 화이트래빗의 김윤형 실장은 “사용자들은 챗봇이 도움이 될 땐 감사인사를 하고 반대의 경우 욕을 하는 등 굉장히 적극적으로 반응한다”고 설명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대화형 AI는 마케팅 수단으로도 각광받는다. 사용자와 상호작용을 하는 동시에 고객의 솔직한 반응을 수집할 수 있기 떄문이다. 은행ㆍ보험사는 물론 쇼핑몰, 택배사 등 각종 고객센터가 챗봇을 도입했다. 부산대병원은 지난 1월부터 챗봇을 통해 환자들의 진료상담을 하고 있다.

지난해 호주 정부는 뉴질랜드의 IT기업 ‘소울머신즈’가 개발한 아바타 챗봇 ‘나디아’를 도입해 장애인들을 위한 AI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디아는 비록 모니터 속이지만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상대의 감정표현을 읽을 줄 안다고 한다. 정재승 카이스트 뇌공학과 교수는 “이제 AI와 사물인터넷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 이미 비서ㆍ친구 등 다양한 성격을 가진 AI가 우리 삶에 말을 걸어오고 있는 현실. 만약 나디아처럼 좀 더 발전된 인공지능이 우리나라에도 도입된다면 영화에서처럼 그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 보인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이우진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과 4)

인간의 감정을 읽는 인공지능 챗봇 '나디아'가 한 장애인과 대화를 하고 있다. 호주 정부는 지난해 장애인 복지 서비스에 나디아를 도입했다. 유튜브 홍보영상 캡쳐.
인간의 감정을 읽는 인공지능 챗봇 '나디아'가 한 장애인과 대화를 하고 있다. 호주 정부는 지난해 장애인 복지 서비스에 나디아를 도입했다. 유튜브 홍보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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