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기자

등록 : 2018.07.19 14:38
수정 : 2018.07.19 15:24

[뒤끝뉴스] 멀고도 험한 '사녹' 방청의 길

등록 : 2018.07.19 14:38
수정 : 2018.07.19 15:24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이 내달 24일 리패키지 앨범으로 컴백한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밤 9시에 시작한다는 ‘사녹’이 다음날 새벽 2시 넘어서 입장. 전날부터 대기타서 3일을 대기한 셈. 평일에 새벽 5시쯤 끝나는 ‘사녹’을 과연 어떤 팬덤이 가능하겠나? 항의 없이 오로지 아이돌그룹 A를 위한 마음으로 관계자 말도 잘 따르고. 그 새벽에 좌석이 가득 차다니… 대단한 팬덤이다.”

아직도 ‘사녹’을 모르시나요? ‘사녹’은 방송사의 ‘사전녹화’를 줄여 쓰는 입니다. 아이돌그룹 팬들이라면 ‘사녹’과 ‘공방’(공개방송)은 기본으로 알아야 할 단어이지요. 문제는 이 ‘사녹’이 새벽에 버젓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위의 글은 지난 2013년 가을께 아이돌그룹 A의 팬이 인터넷 블로그에 남긴 글입니다. ‘사녹’을 아는 분들이라면 현재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더 웃지 못할 일은 아이돌그룹 A가 지난달에도 새벽 2시에 글 속 방송사의 같은 장소에서 ‘사녹’을 진행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일보는 최근 ‘사녹’을 보도(5일자 ‘우리 오빠 새벽 2시래…말도 탈도 많은 사녹’)한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딸을 둔 한 학부모는 “방탄소년단 소속사가 팬 카페에 8월 24일 리패키지 앨범을 내고 컴백한다고 공지했다”며 “딸 아이가 ‘사녹’에 간다고 할까 봐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방탄소년단이 이번 앨범으로 방송활동을 할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각 방송사의 음악프로그램에 출연 계획을 잡았다면 틀림없이 ‘사녹’을 할 겁니다. 방송사들은 컴백한 가수들에게 ‘사녹’의 기회를 줍니다. 새 앨범에 수록된 1~3곡 정도를 ‘사녹’으로 대체합니다. 생방송 무대에서는 타이틀 곡을 소개하는 식입니다.

SBS ‘인기가요’ SBS 제공

‘사녹’을 왜 새벽에 하느냐고요? 각 방송사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음악프로그램 방송시간 때문입니다. SBS ‘인기가요’는 낮 12시 10분, MBC ‘쇼 음악중심’은 오후 3시 35분, KBS2 ‘뮤직뱅크’는 오후 5시에 방영합니다. 케이블채널 Mnet ‘엠카운트다운’은 오후 6시, MBC뮤직 ‘쇼! 챔피언’은 오후 7시에 전파를 타죠. 그러니 ‘사녹’ 시간을 앞당기는 겁니다. 가수의 스케줄 등을 이유로 ‘사녹’은 방송 당일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빠듯하게 ‘사녹’과 생방송이 이어지다 보니 팬들이 피해를 입기 마련입니다. 새벽 2시에 ‘사녹’을 진행한다고 하면, 팬들은 이보다 한참 이른 시간(대략 저녁 8~9시)부터 방송사 앞에서 대기합니다. 선착순으로 입장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선착순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대개 1~6등급으로 나뉩니다. 제 아무리 일찍부터 줄을 섰다고 해도 앞 등급이 아니면 녹화장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500여명이 ‘사녹’에 모여듭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팬 카드’에 도장이나 스티커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돌그룹 B는 앨범을 발매할 때 팬 카드를 끼워 함께 판매합니다. 아이돌그룹 C는 공식 팬클럽에 가입하면 팬 카드를 발급합니다. 이 팬 카드가 있느냐 없느냐로 ‘팬 등급’이 나뉘기도 합니다. 하지만 팬 카드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 도장이나 스티커를 받아야 하지요. 아이돌그룹 B의 팬 카드를 펼치면 작은 동그라미 안에 1~5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 곳에 도장을 받게 됩니다.

‘새벽 사녹’에 500여명의 팬들이 모이는 이유도 도장이나 스티커를 받으면 1등급이 될 수 있어서지요. 500여명이 한꺼번에 녹화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각 소속사와 팬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방식이랍니다. ‘사녹’을 위해 줄은 선 팬들은 소속사나 혹은 팬 대표의 ‘순번 정하기’를 기다립니다. 이들은 팬들의 손목에 등급과 순번을 팬으로 적습니다. 200~300명이 입장 가능한 녹화장이지만 많은 팬들이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MBC ‘쇼 음악중심’ MBC 제공

이렇게 순번을 정하는 시간이 두 시간 남짓이라고 합니다. 녹화가 시작되더라도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팬들은 도장이나 스티커를 받으려고 더 기다립니다. 그래야 다음 번 ‘사녹’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1등급은 팬 카드와 해당 아이돌그룹의 구매한 최신 앨범, 타이틀곡 음원 구입 내역을 지참해야 합니다. 5,6등급은 최신 앨범이나 음원 구입 내역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경우지요.

아이돌그룹 D의 한 팬은 1등급을 받았지만 녹화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하소연 하기도 했습니다. 가수를 응원하기 위해 필요한 ‘응원 물품’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서랍니다. 형광봉과 팔찌, 응원 문구 피켓 등 팬들 사이에서 요구하는 물품이 하나라도 없으면 ‘사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팬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전략입니다만, 팬이 되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난합니다.

이러한 ‘새벽 사녹’이나 팬 등급제에 불만을 가진 팬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 간섭 말라”는 팬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소속사들도 “팬들이 원해서” “팬 서비스 차원”이라며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고 합니다. 방송사들도 “기획사들이 자체적으로 하는 일” “팬들이 안 와도 그만” 등이라고 말하며 ‘새벽 사녹’에 대해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10대 청소년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오전 7~8시에 ‘사녹’을 하더라도 선착순 입장과 순번 정하기 때문에 팬들은 새벽 1~2시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아이돌그룹 E의 부산 거주 팬은 오전 7시 ‘사녹’을 보기 위해 심야 KTX를 타고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밤을 새는 일도 다반사여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밤샘 친구 찾기’ 글이 올라오기도 하죠. 늦은 시간 각종 범죄에 노출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학부모들은 좌불안석입니다.

그래도 팬들은 “괜찮다”고만 합니다. 가수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서 일겁니다. 한 가지만 개선됐으면 한다는 팬이 있었습니다. ‘사녹’ 시간이 원래 공지한 대로만 진행됐으면 한다고 말입니다. 소속사들은 회사 홈페이지나 팬 카페에 각 방송사들의 ‘사녹’을 공지합니다. 그러면서 ‘녹화시간은 방송사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해놓습니다. ‘사녹’이 몇 시간씩 지체되는 건 예사고, 그렇게 들어간 무대가 단 5분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수를 보고 싶은 팬들이 감수해 내야 하는 고통 아닌 고통인 셈입니다.

아이돌그룹 F의 팬은 “방송사의 갑질도 문제”라고 제보했습니다. 3시간 넘게 ‘사녹’을 기다린 팬들을 대상으로 공항에서나 할 법한 소지품 검사를 했다는 겁니다. 녹화장에서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검사였을 겁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갔지만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다니 가혹합니다. 이게 진정 팬을 위한다는 아이돌그룹의 팬 서비스 맞나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조현민 불법 등기’ 진에어 면허 유지… “신규노선 불허”
김경수 영장실질심사 출석 “성실하게 소명하겠다”
2022학년도 대입 수능전형 30% 이상 늘린다
국회 특수활동비 남겨서 어디다 쓰려고?
진료 중 성범죄 의료인 자격정지 1개월→1년 “여전히 솜방망이”
'박원순 시장 쇼하지 마라' 골목길에 드러누운 반대 시위대
미 상원, 반 트럼프 ‘사설연대’ 에 가세 “언론은 적이 아니다”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
인터랙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