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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일당 얼마짜리래요? 지역사회에선 일일이 따지면 안돼!

입력
2015.07.3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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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선 상냥한 아가씨가 폭염경보, 감나무 과수원 가서 첫 아르바이트

사표 쓰고 농사일 한 지 4년 아직도 듣는 원기자 호칭 거북

농사 지어서 얻는 수입은 절반 "전업 농부의 길 멀었나" 되새김

이웃마을 형님이 감나무에 매달린 열매의 수를 세어 리본에 적고 있다. 풍수해 보험 가입 농가들은 이렇게 사전 조사를 미리 해두고 후에 태풍 피해 등을 입게 되면 해당 나무의 피해를 비교해 보험금을 수령한다.
이웃마을 형님이 감나무에 매달린 열매의 수를 세어 리본에 적고 있다. 풍수해 보험 가입 농가들은 이렇게 사전 조사를 미리 해두고 후에 태풍 피해 등을 입게 되면 해당 나무의 피해를 비교해 보험금을 수령한다.

안개가 구렁이처럼 서시천을 따라 꿈틀거렸다. 윤곽이나 겨우 구별할만큼 빛은 아직 가라앉아 있었지만 안개는 그 실루엣마저 흐릿하게 문질러댔다. 안개 두께만큼 뜨거워질 날씨에 새벽부터 지레 겁을 먹는다. 어젯밤에도 TV뉴스 막바지에 나온 기상캐스터는 나실나실한 원피스를 입고 며칠째 웃는 낯으로 ‘폭염경보’를 알렸다. 다음주까지 시원한 날은 없을 거라고 경고도 했다. “각오 단단히 하라”는 말을 그렇게 상냥하게 하는 사람도 드물 거다. 면사무소에 도착해 잠깐 기다리는데 끈적한 습기는 벌써 뒷목에 내려앉고 있었다.

나오기로 한 사람들이 5시 정각에 모두 모였다. 아르바이트를 위해 나온 사람들이다. 풍수해보험에 가입한 감나무 과수 농가를 돌며 표본 나무에 매달린 열매 숫자를 세는 일이다. “어이~ 원기자. 아침 드셨능가.” 한 형님이 인사를 건넸다. “기자는 무슨. 아 예 뭐 그냥 예.” ‘세수도 못하고 바지춤 올리면서 겨우 나왔구만.’ 그 중엔 실제로 아침 식사까지 한 사람이 많았다. 해 뜨면서 곧 뜨거워질 것을 염려한 사람들은 서둘러 업무분장을 마치고 조를 짜서 과수원으로 흩어졌다.

아까 그 형님과 한 조가 돼서 첫 농장에 도착하니 한껏 날이 밝아졌다. 안개와 이슬에 묶여 돌아다녔지만 선선한 기운도 아직 남아 있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경험이 있는 형님에게 이것 저것 묻다가 가장 중요한 일당을 물어봤다. “이 일 얼마짜리래요?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작년에 어떻게 받으셨어요?” 얼마 받는 일인지도 모르고 나선 게 바보 같기도 했지만 궁금했다. “글씨 나도 몰러. 기억도 안 나고. 그냥 주면 받고 그랬지 뭐 일일이 따져 봤간디.” 약간 답답했다. “그러게요. 뭐 어떻게 되는 건지 확인하려다가 서울서 내려온 깍쟁이 소리 들을까 봐 더 묻지도 못 하겠더라구요.” 형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그래야제. 살면서 너무 따지고 그러면 지청구 들어. 그냥 멍충~하게 지내다 보면 다 흘러가는 대로 가게 돼 있는 법이시. 그거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여.”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지역사회’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부분은 긴 장광설 끝에 “지역사회에서 그러면 쓰나” 하는 식의 말이다. 아마도 ‘소규모 지역사회’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인 것 같은데 사실 적잖이 겁나는 단어다. 실제로 군(郡)은 대도시 구(區)와 같은 급이지만 구례 인구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 주민 수의 10분의 1정도 수준이다. 주민들도 군 전체를 동네의 개념으로 여기고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면에 살아도 한 다리 건너면 호구조사가 끝나고, 웬만하면 중학교 선후배 관계로 다 정리된다.

엊그제도 동네를 지나다가 아는 경찰관을 만났는데 흥건한 땀을 닦으며 내뱉는 하소연부터 들었다. “아따 형님 미치겄소. 저짝 마을에 신고가 들어와서 가봉께 아지매가 낫 던지고 괭이 쳐들고 아제 죽여 뿐다고 난리를 부리는 거라요.” 아마도 아저씨가 읍에 사는 아줌마와 바람이 난 걸 아주머니가 알고 소동을 벌인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 아제도 그렇지, 지역사회에서 바람 피면 사흘 안에 소문나는 거 모르고 그런대요. 아무리 눈깔 뒤집히면 뵈는 게 없다지만...”

예전엔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다가 “말씀 들었습니다” 하면 그냥 인사치레겠거니 했지만 여기서는 “아 그분이구마요” 하면 가슴이 살짝 철렁한다. 나대지 말고 살자는 신조로 지내왔건만 나에 대해 뭐가 어떻다고 들은 건지 사람보다 말이 무섭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뒷담화가 이틀이면 당사자 귀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구례에서는 연애도 못 혀요. 금방 소문나고 다 아는 애기 덜인디 잘 되믄 모르까 조져불면 두고두고 말 듣는당게요.” 한 동생이 맘에 드는 사람이 있는데 수작도 못 붙여보는 이유로 댄 말이다. 그저 귀로 들어온 거 입으로 나가지 않게 하는 게 최고일 터이다.

11시경 알바를 마친 뒤 형님은 식사를 같이하면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다. ‘꼰대’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묻지도 않는데 가르치려 드는 거라지만 그 형님은 감나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궁금한 사항을 족집게 과외 하듯 알려줬다. 50대가 되면 입 닫고 지갑 여는 시기라고 했는데 그런 원칙도 잘 지키는 분이었다. 시원하게 먹고 시원하게 내신 형님과 헤어지는데 또 전직을 들먹였다. “원기자 애쓰소!” 그 형님은 아마도 기자라고 불러주는 걸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비모양 꽃을 피운 땅콩. 땅콩에 꽃이 피는 것은 귀농후에야 알게 됐다.
나비모양 꽃을 피운 땅콩. 땅콩에 꽃이 피는 것은 귀농후에야 알게 됐다.

사표 쓴 지 만 4년이 지났고, 관청에 농업 경영체도 등록하고 농민이라는 걸 증명할 요건은 다 갖췄는데 아직도 도시 출신이라는 딱지가 선명한가 보다. 이곳 분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원선생, 원사장, 원기자, 선재 아빠 등등. 하지만 아이도 기숙사 찾아 가출한 마당에 지금의 나를 표현하는 정확한 호칭은 없다. 특히 ‘기자’라는 호칭은 참 싫다. 이젠 기자도 아니려니와 오죽하면 직업에 놈 자(者)자를 붙일까.

예전에 신문사에 있던 시절, 취재를 나가 보면 홍보업체 직원들이 ‘기자님’ 소리를 연발하며 안내했고 몇몇 기자들은 갑질하듯 고개 빳빳이 들고 접대 받는 모습을 봤다. 때 되면 그들이 사는 밥을 당연하듯 얻어먹고, 가끔 저녁엔 술자리도 챙겨 먹곤 했다. 가끔 그들이 친절하지 못하다며 호통치는 선배도 봤고, 술자리가 약하다고 주정하는 선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인도코끼리 생각이 났다. 한 코끼리가 사람들이 자기를 올려다 보며 칭송하고 절하는 모습을 보고는 우쭐했단다. 머리에 임금을 태우고 다니니 그랬던 건데 지가 잘나서 사람들이 굽신거리는 줄로 착각하고 까불다가 큰 코 다쳤다는 코끼리 얘기다. 당시에도 그냥 ‘원유헌씨’로 불리는 게 제일 편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불리는 게 나을까. 원농부? 농부 원씨? 좀 이상하다. 어쨌든, 서류상 농민이라고 진짜 농부가 된 것이 맞을까 의심스럽다. 가계부를 들춰보면 농사 지어서 얻는 수입이 겨우 절반을 넘는다. 나머지는 아르바이트와 잡수익들이다. 그렇다면 반 농부, 반 알바 정도 되는건가? 그렇다고 전업농가들이 농사로만 충분히 살아가는 경우도 보기 힘들다. 동네 어머니들도 관공서 청소 일이나 공공근로에 적극 나서고, 남자들도 농사짓는 틈틈이 건축 현장이나 토목공사 현장에서 막노동 일을 많이 한다. 수확 철이 아니면 돈 생길 구멍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농장에 도착하니 장씨아저씨 차가 서 있다. ‘차만 세우고 밭에 가신 건가’ 하면서 농막으로 들어서니 냉장고에 있던 물을 꺼내 드시고 계셨다. “허어, 걸려부렀네. 살짝 먹고 갈라고 했는디” 무슨 나쁜 짓 하다 걸린 중2처럼 미안해 하셨다. “괜찮아요 아저씨” 했더니 그게 아니라신다. 주인 없는 농장에 드나드는 걸 사람들이 보고 욕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또 그걸 보고 다른 사람도 빈 농장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좋을 게 없다고도 하셨다. 두 수쯤 더 생각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시는 호박을 갖다 주실 때도 농장 입구에 바구니 채 놓고 가셨다.

논에 몰려 앉아 있는 백로들. 한때 둥지를 찾아다니며 그림같은 백로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이제는 미워졌다. 제초 담당인 우렁이를 잡아먹는 그냥 나쁜놈들로만 보인다.
논에 몰려 앉아 있는 백로들. 한때 둥지를 찾아다니며 그림같은 백로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이제는 미워졌다. 제초 담당인 우렁이를 잡아먹는 그냥 나쁜놈들로만 보인다.

“아저씨, 사람들이 자꾸 저한테 원기자라고 하는데 좀 듣기 거북해요.” 오전에 생각하던걸 말씀 드렸다. “왜, 자네보고 또 기자 하라든가?” “그건 아닌데, 무슨 민원을 저보고 해결해 달라는 사람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싫어서요.” 아저씨는 아랫입술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뭔가 말씀 전에 생각이 필요할 때 나타나는 전조증상이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네가 기자도 아니고 앞으로 할 것도 아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해쌌든 뭐하게 신경 써.” “신경 쓰인다기 보다 이젠 농부로 봐 줬으면 하는데 아직도 기자질 해먹던 놈으로 보는 것 같아서요.” 아저씨는 다시 입술을 내미셨다. “뭐가 됐든 그냥 먹고 살면 되는 거고, 거기에 신경 많이 쓰면 되는 거지, 자네가 뭐이 대단하다고 불리든 말에 상관하는가. 사람들이 기자라고 부르면 기자 되고, 농부라고 부르면 농부 되는가? 자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걍 아무것도 아녀. 별 쓰잘데기 없는...”

괜히 말씀 드렸다가 혼만 났다. 말씀대로 아직도 내가 뭐나 되는 줄 알고 있나 보다. 허세와 허풍으로 치장하는 습관이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면 좋겠는데 아직도 묵은 때처럼 주름 골골이 숨어있는 모양이다. 남들이 뭐라고 해서는 핑계이고, 내가 더 신경 썼던 게 잘못이었다. 저만치 차로 가시던 아저씨가 뒤돌아 보시고 소리를 지르셨다. “어이 유헌이. 거 문 앞에 오이 몇 개 놔뒀네. 무쳐 묵게~” 맞다. 가장 정확한 호칭은 ‘어이 유헌이’ 정도일 것 같다. 그냥 이도 저도 붙이지 않은 달랑 내 이름이 그나마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이튿날 아침 아들과 학생 3명을 태우고 교육청이 주관하는 캠프 장소로 향했다. 학교측 사정으로 학부모 중 한 명이 인솔해야 한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안내 유인물에 교육원 장소가 정확하지 않아 아들에게 물었더니 함양이란다. 전남교육청이 주관하는 행사인데 경남 함양에서 캠프를 진행한다는 게 의아해 확인해 보니 교육 제목이 ‘리더십 함양과정’이라 그런 줄 알았단다. 아들한테 필요한 게 리더십인지 상식인지 헷갈린다.

해남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연신 수다를 떨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연애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누구랑 누가 사귀다가 두 달 만에 찢어졌다는 둥, 누가 누구를 쫓아다니다가 걔 오빠한테 디질 뻔 했다는 둥 뭐 그런 얘기였다. 그러던 중 뒷좌석에 있던 여학생이 아들에게 물었다. “우리 선재가 아무개랑 사겼다믄서?” 아들과 다른 중학교를 나온 아이였다. “갸가 그 작년 산동 수련회 때 나와서 야물게 춤추던 그 아이냐?” 아들이 놀라서 물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어?” 여학생은 귀엽다는 듯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가, 여기 구례여. 구례에 비밀이 어딨당가. 내가 더한 것도 아는디 확 얘기해불까? 짜슥.”

웃었지만 섬찟했다. 여기는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그냥 좀 더 조신하게 살아야겠다.

원유현 前 한국일보 기자 cama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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