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M&A·브랜드 수수료 등
규제·비판 피하기 新트렌드로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국회 낮잠
"선제적 입법으로 견제해야" 지적
국재벌들의 경영권 승계 및 강화 방식은 갈수록 진화하고 있지만 변칙ㆍ부당 승계 내지는 상속을 방지할 수단은 여전히 거북이 걸음인 것으로 드러났다. 차명 주식이나 주식 관련 사채를 이용해 부를 대물림하던 1~2세대 재벌들이 삼성특검 사건 이후 규제가 강해지자 일감몰아주기 및 계열사 인수ㆍ합병 등의 우회 승계 방식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국회는 관련 법안의 입법화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최근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을 통해서도 '재벌 오너 리스크'가 국가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확인한 만큼, 국회가 선제적 입법을 통해 재벌의 건전한 승계를 유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감 몰아주기, 인수합병 새로운 승계 방식
한국일보와 국회 정무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기식 의원의 공동 분석에 따르면, 최근 재벌의 경영권 승계 방식으로 일감 몰아주기와 계열사 내 인수 합병 방식 등이 새로운 패턴으로 자리잡고 있다. 과거 재벌 1~2세대가 재단이나 차명주식 등을 이용한 방식으로 부를 대물림한 것에 비하면 진일보한 셈이다. 현대차그룹을 비롯한 대다수 재벌들은 간접지분 확보를 통해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피하면서, ‘브랜드 수수료’ 명목으로 계열사로부터 경영권 승계 자금을 받아내는 등 변형된 일감몰아주기 방식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삼성과 SK가 계열사 합병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이자 대림그룹을 포함한 다른 재벌기업도 인수ㆍ합병 방식을 통해 경영권 승계 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재벌들의 편법 승계를 견제할 공정거래법 및 상법 개정안 등 총 19개 법안은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재벌개혁특별위원회(위원장 박영선)가 합병 규제와 일감 몰아주기, 지주회사 규제 강화 등 관련 법안의 처리를 시도하고 있지만 여권은 관심이 없다. 이에 김기식 의원은 “19개 법안 중 13개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밝힌 경제민주화 공약에 포함된 것”이라면서 “재벌승계 문제가 여론의 주목을 받는 지금이 여야 모두에게 재벌승계 문제를 해결할 정치적 적기”라고 주장했다.
‘쓰리 쿠션’으로 일감몰아주기 비판 우회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5대 그룹의 3세대 경영은 문어발을 넘어 ‘지네발’에 가까워지고 있다. 비교적 승계 구도가 명확했던 이건희ㆍ정몽구 회장 등 2세대 재벌 오너 시대를 지나면서 5대 그룹의 3~4세대 재벌 중 친족이 공식적으로 승계 받은 계열사 수는 69개에 이른다. 5대 그룹 경영 전반에 오너 일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얘기다.
재벌그룹이 3~4세 경영인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승계 방식은 일감몰아주기다. 물론 현행 공정거래법은 총수일가 등 지배주주들이 지분의 30%를 넘는 회사가 일감 몰아주기 행태를 보이면 강력한 규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재벌들은 작은 회사를 만들어 간접적으로 지주회사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피해 가면서 내부자 거래를 통한 일감몰아주기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한화그룹의 경우, 한화에너지의 일감 몰아주기가 문제가 될 수준에 오르자 총수 일가가 한화에너지를 직접 경영하지 않고, 김승연 회장의 자녀 3형제가 100% 지분을 보유한 한화S&C를 한화에너지의 최대주주로 만드는 방식으로 간접 경영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김기식 의원은 “한화에너지의 총수 지분을 유지하지 않고도 법의 틀 안에서 일감몰아주기를 통해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부를 축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그룹 역시, 삼성웰스토리를 유사한 방식으로 활용해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교묘히 피하고 있다.
●‘브랜드 수수료’로 경영권 강화하는 재벌
재벌들은 ‘브랜드 수수료 몰아주기’라는 방식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랜드 수수료란 특정 기업 상호를 사용하는 회사가 상호명 소유권을 가진 회사에게 매출액의 일정 부분을 사용료 명목으로 지급한 돈을 말한다. 문제는 브랜드 수수료에 대한 규제와 지급 기준에 대한 법제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재벌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기업 총수일가가 운영하는 지주회사에 브랜드 수수료를 몰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김기식 의원실에 따르면, LG, SK, GS, CJ, LS 그룹 계열사에서 지급된 브랜드 수수료는 2010년 4,700억원에서 지난해 6,710억원으로 40% 가량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5년 동안 이들 그룹이 챙긴 수수료 총액은 3조36억원에 달했다. 한국타이어의 경우 지주회사 격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가 계열사로부터 매출액의 0.5%를 브랜드 수수료로 지급받고 있지만, 롯데그룹은 반대로 신격호 회장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롯데관광개발에게 브랜드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는 방식으로 부를 보전해주고 있다.
전환사채(BW) 등 주식을 이용한 승계 방식은 저물고 있지만, 1세대부터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공익재단을 활용한 경영권 승계도 여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상속 및 증여세법상 성실공익법인으로 인정만 받으면, 공익재단이 내국법인의 주식을 10%까지 보유할 수 있고, 증여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박영선 새정치연합 의원실에 따르면, 올 7월31일 기준으로 삼성은 삼성문화재단 등 3개 공익재단을 통해 시가총액 5조4,402억원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대차와 LG도 공익재단을 통해 각각 3,362억원, 3,593억원의 주식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 대선공약 이행하면 풀린다”
재벌의 편법승계와 관련해 국회에 계류 중인 관련 법안은 공정거래법, 상법, 국민연금법, 보험업법 개정안 등 총 19개다. 이중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당시 내건 '경제민주화' 공약과 관련된 법안이 13개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내용도 금융회사의 의결권 제한 방안부터, 최근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으로 주목받고 있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까지 재벌 지배 구조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특히 이들 법안은 재벌들의 일감몰아주기로 피해를 받는 소액주주들을 보호할 상법상 소액주주 견제 방안도 다수 포함하고 있어 진화하는 재벌승계 문제의 견제 수단으로 기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여당이 박 대통령 집권 2년 차에 들면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처리에 눈에 띄게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어, 이들 법안이 현실화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새누리당은 지난해 7월 이후 금융회사지배구조법 한 건에 대해서만 국회 본회의 통과를 합의했으며, 나머지 13개 법안에 대해선 언급조차 꺼리는 상황이다.
새정치연합은 박 대통령의 친 재벌 기조 전환이 여당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만 최근 롯데 경영권 논란으로 재벌승계 문제에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된 만큼, 당 재벌개혁 특위를 중심으로 여당에 지속적인 압박을 전개할 방침이다. 특위 관계자는 "김기식 의원이 일감 몰아주기 및 브랜드 수수료 문제 등 진화한 부분에 대해, 박영선 위원장이 공익재단 이슈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재벌승계 문제를 선제적으로 풀어갈 계획"이라며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 관련된 만큼, 여당의 입장만 전환되면 의외로 재벌승계 입법화 문제가 쉽게 진행될 가능성도 높다"고 밝혔다.
정재호기자 next88@hankookilbo.com
이동현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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