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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들은 왜 자식의 신체를 훼손했나

입력
2016.02.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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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없는 색시’ 임어진 글, 김호랑 그림

작년에 출간된 도서 중에 가장 엽기적인 제목을 지닌 책은 ‘엄마가 날 죽였고, 아빠가 날 먹었네’일 것이다. 영미 유명작가 41명이 고전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단편소설들을 모았다. 책의 제목은 앨리사 너팅이 그림형제의 ‘노간주나무’를 다시 쓴 작품의 한 대목에서 따왔다. ‘노간주나무’는 계모가 의붓아들을 죽인 다음 들키지 않으려고 토막 내 스튜를 만들어 남편에게 먹인다는 내용이다. 죽은 의붓아들이 어여쁜 새로 환생해 계모를 응징하는 결말이 따라온다.

그림형제가 수집한 독일 민담 중엔 잔인하고 기괴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손 없는 처녀’도 ‘노간주나무’ 못지않게 기괴하다. 아버지에 의해 손이 잘린 처녀가 집을 나와 떠돌다 임금님과 결혼해 아들을 낳고, 아기와 함께 궁전에서 쫓겨났다가 손이 다시 돋아나고 남편과 재회해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자른다는 이야기는 계모가 의붓아들을 토막살인 한다는 이야기보다 유혈은 덜 할지 몰라도 잔인하기로는 막상막하다.

계모가 편지를 바꿔치기 해 시집에서 쫓겨나는 손 없는 색시. 등에 묶인 아기와 함께 길을 떠난다.
계모가 편지를 바꿔치기 해 시집에서 쫓겨나는 손 없는 색시. 등에 묶인 아기와 함께 길을 떠난다.

‘손 없는 처녀’를 독일의 특이한 민담으로 알고 있다가 그림책 ‘손 없는 색시’을 만났다. 아버지에 의해 손이 잘리고 집에서 내쫓긴 처녀가 부잣집 도령과 결혼해 아들을 낳고, 아기와 함께 시집에서 쫓겨났다가 시련 끝에 손이 다시 돋아나고 남편과 재회해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처음엔 독일 민담 ‘손 없는 처녀’를 한국적으로 각색한 그림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 장 ‘글쓴이의 말’을 보고 흠칫했다. “‘손 없는 색시’는 참된 사랑과 모성의 능력을 감동적으로 보여 주는 아름다운 우리 옛이야기입니다” 저 특이하게 잔인한 독일 민담과 비슷한 민담이 한국에도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손 없는 색시’와 독일의 ‘손 없는 처녀’는 이야기의 구성이 깜짝 놀랄 만큼 비슷하다. 집에서 나온 처녀는 목이 말라 배나무를 입으로 따먹다가 배나무의 주인인 도령/임금님과 결혼한다. 남편이 과거시험을 보러/전장을 지휘하기 위해 집을 비운 후 아들을 낳는다. 착한 시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만 뒤바뀐 편지에 의해 억울하게 시댁/궁전에서 쫓겨난다. 아기를 등에 묶고 떠돌던 색시/왕비는 우여곡절 끝에 손이 다시 돋아나고,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찾아다닌 도령/임금님과 재회한다.

집에서 쫓겨나 헤매던 처녀는 목이 말라 배를 입으로 따먹다가 도령을 만나게 된다. 도령은 손이 없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집에서 쫓겨나 헤매던 처녀는 목이 말라 배를 입으로 따먹다가 도령을 만나게 된다. 도령은 손이 없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나라마다 문화는 달라도 인간의 정신세계는 공통적인 부분이 많아 세계적으로 비슷한 민담이 많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특이한 이야기가 가까운 나라도 아닌 옛 한국과 독일에서 공통적으로 전승돼 왔다는 것이 신기하다. (알고 보니 손 없는 색시 민담은 한국, 독일뿐 아니라 중국·일본·몽골·러시아·프랑스·아프리카 대륙·아메리카 대륙 등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민담으로, 천일야화에서도 단편적인 기록이 확인된다고 한다. 손을 자르는 이야기가 보편화한 것은 인간 활동의 가장 필수적인 신체 부위가 손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독특한 점은 손이 잘리고 재생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민담 속 주인공은 으레 집에서 떠나 고난을 겪고 극복한 후 행복해진다. 그러나 ‘손 없는 색시/처녀’ 속 주인공은 친정과 시댁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떠나게 되는, 이중의 시련을 겪는다. 그만큼 이야기가 더 복잡하고 풍부하다.

‘손 없는 색시’를 처음 읽었을 땐 독일 민담 ‘손 없는 처녀’와 비슷한 점이 커 보였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읽다보니 서로 다른 점도 많았다. ‘손 없는 색시’의 주인공은 계모의 모함으로 아버지에 의해 손이 잘리고 집에서 쫓겨나지만 ‘손 없는 처녀’의 주인공은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가난한 아버지에 의해 손이 잘린 후 스스로 집을 떠난다. 한국 민담에선 계모가, 독일 민담에선 악마가 시련의 근원이다. 손 없는 색시가 시댁에서 쫓겨나는 것은 도령과 시어머니의 편지를 계모가 거짓 편지로 바꿔치기 했기 때문인데, ‘손 없는 처녀’에선 악마가 편지를 바꿔치기 한다.

남편과 재회하는 색시. 담백한 그림이지만 인물의 표정이 마음속 소용돌이를 짐작하게 한다.
남편과 재회하는 색시. 담백한 그림이지만 인물의 표정이 마음속 소용돌이를 짐작하게 한다.

‘손 없는 색시’와 ‘손 없는 처녀’가 결정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시집에서 쫓겨난 후 손이 다시 돋아나고 남편과 재회하는 과정이다. ‘손 없는 색시’의 주인공은 걷다 지쳐 샘에서 물을 마시려 엎드렸다가 등에 묶여있던 아기가 물에 빠진다. 아기를 건지려 물속으로 팔을 뻗는 순간 손이 새로 돋아난다. 마고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색시는 베를 짜 스스로의 노동력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며 아기를 키운다. 색시를 찾아 벼슬도 마다하고 고을고을을 헤매던 도령과 재회했을 때 색시는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이군요”라고 하며 도령을 돌려보내려 한다. 옛날에 없던 손이 있지만 자신의 아내임을 확신한 도령은 색시를 와락 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손 없는 색시’에 비해 ‘손 없는 처녀’는 주인공의 주체성과 이야기의 극적 재미가 다소 떨어진다. ‘손 없는 처녀’의 주인공은 궁전에서 쫓겨난 후 천사의 보살핌을 받아 살아가고, 드라마틱한 사건 없이 깊은 신앙심과 신의 은총으로 손이 저절로 자라난다. 7년 후 임금님과 재회하는 것도 좀 싱겁다. 천사가 먼저 임금님을 맞닥뜨리고 주인공은 “옆방으로 가보세요. 왕이 오셨어요”라는 천사의 말에 따를 뿐이다.

악마와 천사가 등장하는 ‘손 없는 처녀’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윤리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계모와 마고할머니가 등장하는 ‘손 없는 색시’는 가부장 사회의 가혹함을 고발하고, 여성이라는 존재가 살면서 겪어내야 하는 통과의례를 보여준다.

그림책 ‘손 없는 색시’에선 계모가 “점쟁이 말이 저 아이가 없어야 집안이 편할 거래요. 두 손을 잘라 내쫓지 않으면 우리 집안이 망할 거라지 뭐예요”라고 모함해 아버지가 주인공의 손을 자른다. 그러나 한국에서 채록된 수많은 손 없는 색시 설화 중 대다수의 이야기에는 계모가 쥐를 이용해 주인공이 낙태했다고 모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쥐를 이용한 낙태 모함은 장화홍련전 등 다른 계모 설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여성을 정절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폐해를 드러낸다. 아버지에 의해 잘린 손은 피 한 방울 없이 하늘로 날아가거나 새가 되거나 새가 물어갔다고 하는데, 주인공이 억울하고 불쌍한 희생자임을 각인시킨다. 어쨌든 팔을 자른 사람은 아버지이지만 가부장의 무능함과 가혹함은 계모의 악행에 가려진다. 악한 계모 뒤에서 가부장은 권위를 유지한다.

물에 빠진 아기를 구하려 목숨을 건 색시에게 두 손이 돋아난다.
물에 빠진 아기를 구하려 목숨을 건 색시에게 두 손이 돋아난다.

주인공이 친정과 시집에서 쫓겨나는 이중의 시련은 결혼과 출산을 통해 아내와 어머니로 거듭나는 여성의 인생을 보여준다. 옛 여성들은 결혼하면서 친정과 결별했다. 손이 잘리며 친정에서 쫓겨나는 첫 번째 시련은 딸이 아닌 아내로 거듭나는 것을 상징한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등 다른 계모설화는 계모에게 학대받던 주인공이 왕자를 만나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이야기를 끝낸다. 그러나 ‘손 없는 색시’의 시련은 결혼한 이후에도 이어진다. 시집에서 쫓겨나는 두 번째 시련은 색시가 도령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것 같아 보이지만, 남의 손에 기대 산다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동시에 여성의 두 번째 통과의례(시집에 적응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의 고통을 보여준다. 두 번의 힘겨운 통과의례를 거쳐 색시는 진정한 모성을 획득한다. 물에 빠진 아이를 잡으려는 순간 색시의 두 손이 돋아나는 것이 그것을 상징한다. ‘손 없는 색시’의 두 번의 시련은 여성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과정이 그만큼 복잡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이 인간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정체성을 찾는 일이 남성보다 두 배는 더 어렵다는 것 아닐까.

여성이라는 존재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는 이 이야기에 공감할지라도 많은 엄마들은 그림책 ‘손 없는 색시’를 어린이에게 읽어주기를 망설일 것이다. 가부장적인 옛 사회를 알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아버지가 딸의 팔을 자른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무섭거나 잔인한 옛 이야기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읽어줘야 할지 고민하다 아예 피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무섭고 잔인한 옛 이야기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잔혹하고 무서운 이야기도 어린이에게는 필요하다. 무서운 이야기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공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예방주사다. 삶에서 고난과 시련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 옛 이야기를 통해 그것과 맞서고 대결하는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 엄마가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해주는 무서운 이야기는 안전한 장치 안에서 공포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그런데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은 다르다. 말로 듣는 것과 이미지로 보는 것은 그 충격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책 작가들은 무섭고 잔혹한 옛 이야기를 재료로 작업할 때 훨씬 더 세심하고 사려 깊게 임해야 한다.

‘옛 이야기와 어린이 책’을 쓴 김환희 교수는 “민담은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한데 요즘 작가들은 너무 잔인한 장면이나 무정한 결말이 비교육적이라고 판단해서인지 악한을 용서하거나 극단적 결말을 피하는 식으로 끝맺는 경우가 많다”며 “반드시 좋은 선택은 아니다”라고 했다. 반대로 기유 미사오, 안나 이즈미 같은 일본작가들이 쓴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같은 이른바 잔혹동화들은 상술에 찌들어 원작을 자극적 방식으로 훼손한 “형편없는 싸구려 소설”이라고 비판했다.

계모의 모함에 넘어간 아버지에 의해 주인공이 손이 잘린 직후의 장면. 절제된 그림이 빛난다.
계모의 모함에 넘어간 아버지에 의해 주인공이 손이 잘린 직후의 장면. 절제된 그림이 빛난다.
손주현 글, 최수영 그림 '손 없는 색시'의 손 잘리는 장면. 잘린 손과 도끼를 형상화했다.
손주현 글, 최수영 그림 '손 없는 색시'의 손 잘리는 장면. 잘린 손과 도끼를 형상화했다.

그런 면에서 임어진이 쓰고 김호랑이 그린 ‘손 없는 색시’는 어린이에게 충분히 읽어줄 만한 좋은 그림책이다. 임어진의 글은 손 없는 색시 설화의 자극적인 부분은 둥그렇게 다듬고, 극적이고 감동적인 부분은 뭉클하게 살려냈다. 김호랑의 그림은 고운 선과 풍부한 색감으로 한국적이고 따뜻한 감성을 표현했다. 색시와 도령이 결혼하는 장면을 표지 그림으로 쓴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활옷의 넓은 소매와 큰절의 자세가 손 없는 색시의 신체적 결함을 전시하지 않으면서도 제목과 결합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주인공의 손이 잘린 직후의 장면은 절제된 그림이 빛난다. 계모와 아버지는 배제하고 주인공만 등장시켰다. 잘린 손 대신 ‘후르르 날아가 버렸다’라는 글과 어울리게 큰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모노톤의 색감과 단순한 구도는 주인공의 표정에 집중하게 한다. 잔인함은 줄이면서 아픔은 절절하게 표현했다. (손주현 글, 최수영 그림 ‘손 없는 색시’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계모와 의붓오빠, 도끼, 새가 물어간 잘린 손을 형상화했다. 이 그림은 주인공의 아픔과 함께 계모의 악독함을 부각한다) 아기를 구하려다 손이 돋아나는 장면과 물에 흠뻑 젖어 아기를 껴안고 우는 장면은 안타까움과 안도, 환희를 잘 그려냈다. 색시와 도령이 재회하는 장면도 담백한 듯 하지만 마음 속 소용돌이가 살아있다.

새로 생긴 두 손으로 아기를 구하고 기뻐하는 색시.
새로 생긴 두 손으로 아기를 구하고 기뻐하는 색시.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자른다거나 계모가 의붓아들을 토막살인 한다는 옛 이야기를 현실의 일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옛 이야기 속 잔인한 사건은 상징이나 비유로 이해하면 된다. (‘손 없는 색시’를 읽어주고 어린이에게 제 손으로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 정도만 어렴풋이 얘기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계모도 아닌 친아버지가 아들을 토막살인 했다는 실제 사건을 맞닥뜨리니 혼란스럽다. 상징이나 비유로 남아있어야 할 옛이야기의 괴물이 봉인을 물어뜯은 후 책을 갈가리 찢고 뛰쳐나온 듯하다. 잔인한 옛이야기의 결말은 화끈한 권선징악인데, 현실은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김소연기자 au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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