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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믿음과 폭력, 경건함과 위선

입력
2016.11.0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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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해방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자서전 ‘노예의 노래’(모티브, 2003)를 때늦게 읽었다. 이 책과 지은이는 ‘미국 흑인문학 전통의 창시자 겸 저항운동의 아버지’로 고평된 지 오래지만, 이제까지 나의 관심 밖이었다. 흑인은 내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변명해보자면, 이런 맹점은 유독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대공황 극복을 위해 공공사업과 하층 계급 원조를 기본 삼은 뉴딜 정책을 펼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최저 임금 인상ㆍ퇴직 연금ㆍ실업 보험 보장ㆍ주택 보급 같은 혜택을 백인 실업 노동자가 독차지한 사실을 우리는 모른다. 대부분이 소작농ㆍ농장 일꾼ㆍ임시직 노동자였던 흑인에게는 뉴딜 정책의 수혜가 하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더글러스는 1818년 메릴랜드 주 터커호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주로부터 탈주에 성공한 그는, 북부에서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이 자서전을 썼다. 이 책에는 노예제도 아래서 흑인 노예가 당해야 했던 참혹한 수난이 잘 묘사되어 있지만, 나의 주의를 끈 것은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노예주인 가운데 악질들은 하나같이 신심이 깊었다. 그들은 노예주인 중에서도 가장 비열하고 저열했으며 잔인하고 비겁했다”라는 대목이다. 더글러스는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 깊지 않은 노예주가 갑자기 신앙이 깊어지면, 어쨌든 조금은 인자하고 인간적으로 변하지 않겠느냐는 한 가닥 희망이 샘솟았다. 하지만 실망만 안겨주었다.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바뀌지 않았다. 성격에 변화가 있다면 모든 면에서 더 잔인해지고 증오심이 커졌다는 것이다. 종교를 갖게 되자 신의 권능으로 노예 소유의 잔인함을 옹호했다. 비할 데 없는 위선을 경건함으로 위장했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를 지탱한 두 축이 폭력과 기독교(교회)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폭력과 기독교, 혹은 기독교와 흑인 노예제도는 서로 짝이 맞지 않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창세기’ 8장 18~27에 나오는 햄은 전통적으로 하대 받아 마땅한 흑인을 가리키고 있으며, ‘디모데 전서’ 6장 1절, ‘베드로 전서’ 2장 18절, ‘에베소서’ 6장 5~9절, ‘골로새서’ 3장 22절, 24장 1절은 모두 노예제도를 정당화한다.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면 될수록, 즉 성경 말씀을 따르면 따를수록 남부의 노예제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된다.

그 자신이 흑인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더글러스는 기독교에 충실하면 할수록 흑인 노예제도가 정당화되는 교회의 논리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 간극을 억지로 메우고자 했던 그는 자서전 본문에서 기독교를 가열하게 탄핵하던 어조를 자서전 후기에서는 “진실로 나는 극도로 기만적인 이 땅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불러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바꾸었다. 자서전 후기에서 더글러스가 제시한 해결책은 ‘가짜 기독교’와 ‘진짜 기독교’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해결책은 참으로 자기 기만적이다. 진짜 하느님의 말을 따르면 따를수록 동성애는 징벌 되어 마땅하고, 진짜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면 따를수록 여자는 남자의 종이 되어야 하고, 진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따를수록 이교도는 박멸되어야 한다. 더글러스가 직접 겪었듯이, 갑자기 신앙심이 깊어진 노예주인은 진짜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흑인 노예를 더욱 당당하게 핍박했다. 현재도 이슬람국가(IS)는 많은 이슬람으로부터 이슬람적이지 않다고 지탄받고 있지만, IS는 자신들만이 진짜 이슬람이라고 강변한다. 이럴 때 ‘진짜’는 가장 나쁜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근본주의를 의심할 줄 모른다.

백인이 하느님의 말씀을 빌려 흑인 노예제도를 합리화할 때, 흑인은 출애굽 고사(古事)를 자신들의 처지에 빗대는 성서 해석으로 ‘백인의 성경’에 맞섰다. 하지만 본문과 후기가 전혀 딴판인 더글러스의 자서전처럼 노예제도 아래서 흑인은 정신분열적이 되었다. 가장 잘 믿는 사람은 예수의 못 자국을 확인하려고 했던 도마며, 그보다 더 잘 믿은 사람은 유다다. 의심이라는 빈자리에서 진리와 주체가 생겨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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