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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한대수와 장기하가 뿔났다

입력
2018.08.0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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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마찬가지겠지만 내겐 하나뿐인 큰딸이 있다. 자기 일에 열심이면서도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또 예의 바른 청년이다. 그가 어릴 때부터 선택한 일에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마치 인생의 갈림길에 선 내 선택에 대해 아내가 5초 안에 동의해 준 것처럼 말이다. 수학과 과학을 제법 잘하는 아이가 이공계 대학이 아닌 미술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할 때도 아빠로서는 아쉽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미술학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학교에 열정적이며 뛰어난 미술선생님이 계셔서 학업과 미술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의 입에서 수학을 포기해야겠다는 말이 나왔다. 수학 공부만 하지 않으면 그림 그릴 시간이 충분히 생길 것 같다고 했다. 예술의 길에 들어섰으니 수학과 점차 멀어질 줄 알고는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 벌써 수학을 포기하겠다니…. 쉽게 그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 수학을 포기하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행복할 것 같아”라는 말에 두 손 들고 말았다. 하나뿐인 큰딸이 행복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 교육체계는 비균형적이었다. 문과 계열 학생들은 과학과 수학 교육을 극히 조금만 받고 이과 계열 학생들은 역사와 사회 교육에 소홀했다. 이과 출신인 나는 아직도 세계사에 무식하다. 다행히 2018년부터 문과와 이과 구분이 사라졌다. 드디어 통합교육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게 정상이다.

통합교육의 본질은 무엇일까? 누구나 과학과 수학을 진지하게 배우자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지금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통합 수학’ 교과서로 배운다. 수업시간도 예전의 주당 5시간에서 4시간으로 줄었다. 2학년부터는 지수와 로그가 들어 있는 수학I과 미적분을 가르치는 수학II를 배운다. 고등학교는 통합교육을 하지만 대입은 여전히 문이과 계열이 분리되어 있다. 문과 계열에 진학하려는 학생은 미적분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이과 계열에 진학하는 학생은 기하(幾何)와 공간벡터를 배우지 못한다. 대입에 필요 없는 것을 누가 가르치겠는가. 통합교육을 한다더니 수학 교육을 포기한 셈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우리 삶의 목표다. 우리 큰아이도 행복하겠다고 수학을 포기했고, 아이들 행복을 위해 수학 시험을 쉽게 내자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학습 범위가 좁고 문제가 쉽다고 아이들이 행복하지는 않다. 어차피 성적순으로 줄을 세울 테니 말이다. 차라리 수학만큼은 성적을 점수가 아니라 합격·불합격으로 구분하면 어떨까? 필요한 것을 다 가르치고 문제도 쉬운 문제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도 내서 도전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도전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대신 줄 세우지 말고 일정 수준만 통과하면 합격한 것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지금처럼 이과 계열에 진학할 학생마저도 기하를 포기하게 할 바에야 차라리 다시 예전처럼 문이과를 분리하라고 외쳤다. (이걸 진심으로 이해하는 교육관계자는 없기 바란다.) 그러자 오히려 수학자 가운데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었다. 논리적 훈련은 수학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으며, 미적분학이나 위상수학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웬만한 과학자에게도 필요 없다고 강변한다. 어렵고 쓸데없는 수학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코딩 교육에 올빵하라는 것이다.

수학자의 반응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이때 내 손에 수학자의 책이 한 권 들어왔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머튼칼리지와 서울고등과학원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김민형 교수가 최근에 낸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것.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수학자 중에서 수학에 대해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맞다. 화학자는 화학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화학을 하고 생물학자도 생물학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생물학을 한다. 수학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작 화학, 생물학, 수학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 세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더 진지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수학이 왜 필요한 것이기에 수학자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수학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여기에 대해 김민형 교수 책의 편집진은 “누구나 살면서 수많은 문제를 만납니다. 단순하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거나 어떤 답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질문을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길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수학이 필요한 순간은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국가수리과학연구소의 오정근 박사는 중력파 검출에 참여했던 물리학자다. 수학이 그의 업이다. 그의 수학 실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말장난 솜씨는 단연 최고다. 2021학년도 대입 수능시험 때부터 기하가 수학시험에서 빠지게 된 사태에 대해 그는 이렇게 슬픔을 표현했다. “한대수와 장기하가 뿔났다. 벡터맨도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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