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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직은 연두, 그러나 내일은 초록

입력
2017.12.04 14:2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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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연두는 새엄마와 이복동생 보라와 함께 산다. 친엄마도 아빠도 돌아 가셨다. 걸핏하면 침수를 겪는 저지대에 살고 있어서, 학교에 가면 하천 너머 잘사는 동네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엄마와 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릴까 싶어 늘 불안하다. 다행히도 동생 보라와는 마음이 잘 맞는다. 만만찮은 삶의 조건 때문인지 연두는 눈물이 많다. 그 눈물을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다 말려버리는 게 연두의 소원이다.

동생 보라와 함께 천변의 바람을 맞는 게 연두의 숨통을 터주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바람에 커피 향이 묻어온다. 모든 커피를 수작업으로 뽑아내는 ‘카페 이상’에서 연두는 알바를 시작한다. 그 즈음 새 친구 유겸이와도 친해진다. 사방이 어둠이었던 연두에게 조그마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연두는 김선영 소설 ‘내일은 내일에게’의 주인공이다. 나는 연두에게 금방 다가갔다. 연두의 아빠 혹은 카페 사장 아저씨가 된 것처럼 소설 속 연두를 응원하게 되었다. 춥고 쓸쓸하던 연두의 마음에 처음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 건 시각장애인의 사진 촬영 도우미를 하면서부터다. 연두는 자신의 말을 ‘소중히 담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큰 감동을 받는다. 마음을 다해 커피를 내리는 카페 아저씨를 보고 연두는 의문을 가진다. “마음을 담는다, 내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그토록 매달리는 것일까”. 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눈 적 없던 연두는 친구 유겸과 서로의 아픈 마음을 확인하며 가까워진다. 모든 나쁜 가능성을 생각하던 연두에게 희망을 걸 작은 징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카페를 청소하던 연두는 우연히 아저씨의 편지를 읽게 된다. 프랑스로 공부하러 오라는 누군가의 초청을 정중히 거절하는 아저씨의 편지 말미에 연두 이름이 등장했다. “연두에게 우리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그 아이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리란 생각이 듭니다”. 연두는 놀란다. “내 미래를 기대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무엇이라고”. 연두의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여전히 내일은 어둡지만, 연두는 씩씩하게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간다. “나는 살아 있으니까. 나는 살고 싶으니까”라고 외치면서. 연두에게 더 이상 내일은 절망과 걱정의 날이 아니다. 연두는 내일을 내일에게 맡기기로 했다. 오늘의 연둣빛을 더 빛나게 하면 내일은 싱그러운 초록빛이 될 것이다. 내일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오늘에게 보내오는 앞선 시간의 응원이다.

우리는 누구나 비바람을 맞으며 영글어 가는 연둣빛 열매들이다. 그래서 서로의 연둣빛에 숨어있는 초록빛을 발견해줘야 한다.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초록빛이라고 우월감에 취해있는 인생은 자신이 썩어가는 열매라는 걸 모른다. 부모가 조금 가진 것이 뭐 그리 잘난 일이라고, 타인을 공격하는 어설픈 초록들이 많다. 세상의 연두들이여, 고개 숙이지 마라. 너희가 세상을 초록빛으로 만들 주인공이다. 곧 썩어 떨어질 열매를 부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라.

세상은 연두에게 함부로 말한다. 너 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너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연둣빛일 뿐이라고. 그들은 모른다. 작은 씨앗이 가진 내일의 크기를. 내가 학교에 찾아가는 이유는 이 연두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분명 객석에는 자신의 초라한 연둣빛에 고개 숙인 아이가 있다. 그 고개를 들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간다. 공연이 끝나고 사인을 해줄 때, 어떤 아이들은 내게 속삭인다. 오늘 조금 더 구체적이고 단단한 내일을 품게 되었다고. 고맙다 푸른 연두들아. 소설 ‘내일은 내일에게’로 노래를 만들고 있다. 아주 잘 만들어 전국의 연두들에게 힘차게 노래해 줄 테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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