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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입력
2016.09.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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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1_ 언제였던가? 내 나이 너무 어려 첫사랑의 모든 비극을 이기지 못하고 헤어질 때, 떨어지지 않는 발길 이 악물고 돌아서며 약속했었다. 남은 생애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리라, 눈 뜨고 눈 감을 때마다 그대를 떠올리리라…. 당연히 그 맹세는 지키지 못했다. 남들도 다 먹는 세 끼 밥인데 그 밥 먹고 사는 일에 휘둘려 여유가 없었다. 세상살이 무엇 하나 녹록하지 않아서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오히려 술자리에서조차 호사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전혀 심각할 것 없는 이유로 갈라서며 차마 아쉬워 영원에 걸던 다짐, 처음부터 지키지 못할 거짓말이었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거짓말2_ 중학생이던 큰 아이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돈으로 못하는 일은 없어요. 사랑도 돈만 있으면 가능해요.” 엄마인 나는 아이보다 더 확신 있는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 돈으로 못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아.” 그러나 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도록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의 명백한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돈이 점점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되는 세상을 목격하고 있다.

#거짓말3_ “어쩜 얼굴이 하나도 안 변했다!” “도대체 뭘 먹는 거야? 더 예뻐졌어.” 10년 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흔하게 건네는 인사다. 기분 나쁘지 않은 뻔한 거짓말이다. “보고 싶다, 조만간 얼굴 보자.” “언제 밥 한 번 먹자.” SNS로 소통하는 지인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습관처럼 보내는 메시지다. 5년 안에 지킬 확률 50% 이하의 하얀 거짓말이다.

#거짓말4_ 책상 밑에 오래되고 낡은 공사 현장 작업화를 간직한 은행원을 주인공으로 TV광고를 만든 적이 있다. 민영화되는 한국산업은행의 광고였다. 국책은행이었을 때 국가경제에 기여했던 바를 자랑하고, 민영화 이후에 더 큰 일을 하겠다는 각오를 30여년 근무한 행원의 입을 통해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남 NA) 은행원인 그에게는

첫 월급으로 산 작업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멋진 정장구두 대신

이 신을 신고 산업현장을 뛰는 동안,

우리는 조선대국이 되었고

가장 앞선 반도체를 만들었고

정보통신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는 내일도 이 작업화를 신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것입니다.

광고를 내보내고 겨우 7년 만에 KDB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비리에 연루되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저 때의 다짐은 전혀 지키지 않은 것 같다.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쓴 카피는 거짓말이 되었다.

#변명_ 하지만 나는 나의 모든 거짓말을 염치 좋게도 용서하기로 했다. 거짓말과 참말의 경계가 없으신 대통령 덕분이다.

“국가차원의 대형사고에 대해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고,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즉시 전문팀을 파견해서 현장에서 사고에 대응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부처는 재난 안전전문성을 갖춘 전문가 조직으로 확실히 만들 것이며, 이를 위해 순환보직을 제한하고 외국인 전문가 채용까지 고려하도록 할 것입니다.”

2년 전 4월, 세월호 사고 이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하신 말씀이다. 그 지시에 따라 1만300여명이 근무하는 국민안전처가 생겼다. 그리고 2년이 채 되기 전에 경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앞에 국민안전처는 무력했다. 홈페이지는 먹통이 되었고 재난문자는 늑장 발송되었다. 지진 안전국이라는 믿음 때문인지 국민안전처에 지진 전문가로 불릴 만한 직원은 단 한명뿐이었다. 지진만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의 약속과는 달리 안전처가 2년 동안 채용한 재난재해 전문가는 4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민의 안전을 담보로 한 엄청난 거짓말에 비하면 내 사소한 거짓말 정도로는 지옥에 가진 않을 것 같아 안심이다. 그러나 죽어 지옥에 가기 전에 나와 사랑하는 가족들이 살아갈 이 땅이 진짜 ‘헬대한민국’이 될 것 같아서 두렵고 불안하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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