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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휘청거리는 봄날

입력
2018.03.15 14:3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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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계절의 순환은 보챈다고 될 일이 아니지만,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내내 계획한 봄 일에 마음이 급하다. 해토(解土)는 봄비가 한참 더 내려야 하는데 또 춘설(春雪)이 쌓인다. 녹았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질척거리는 산길이 반송에게 다가가려는 발목을 잡는다.

눈을 헤치고 고개를 내민 복수초의 노란 꽃이 가녀리다.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영춘화가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언뜻 개나리꽃 비슷한데 재스민 종류의 다른 꽃이다. 개나리보다 2,3주 먼저 핀다. 왕버들 가지 끝의 뿌연 초록 띠가 겨울을 밀쳐내고 있다. 겨우내 햇볕을 반사하며 꿋꿋이 버틴 희디흰 자작나무 줄기에는 황토색 물이 오른다. 남녘에 만개했다는 매화 꽃봉오리도 봉긋해졌다. 붉은 물이 터질 듯 가득 차면 고고한 함성을 울리며 꽃이 핀다. 봄의 전령사를 자임하는 산수유와 히어리, 생강나무 노란 꽃이 다투어 내는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신생아 울음처럼 울리며 고요한 산중이 갑자기 왁자지껄해진다. 눈 녹는 계곡 물소리가 더해 져서일까.

지난 주말 대학 후배 몇이서 시산제(始山祭) 핑계로 수목원에 들렀다. 짧은 산행이지만 마음은 스무 살 젊음으로 돌아가 겨울 숲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같이 하며 수목원 길을 걸었다. 새싹이 나지 않아 나무 이야기는 추상적이기 십상이다. 눈도 호사하고 귀도 호강했다는 감사 인사가 도시생활에 주눅 들어 소시민이 되어가는 안타까움으로 들렸다. 이제 연금에 의존하는 그들에겐 공허하겠지만 고향 빈 밭에 묘목이라도 심어 생명의 애착을 느끼라고 권했다. 농부의 시간은 1년이 여덟 달밖에 없다. 땅이 얼고 비가 내리는 기간 때문이다. 그들이 가고 남은 서너 시간 조바심으로 반송 가지를 다듬었다. 조금이라도 해찰을 부리면 또 1년이 훌쩍 가버린다. 나무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방식대로 성장하게 마련이다.

봄날은 생명의 탄생만 있는 게 아니다. 조용중(趙庸中) 선생이 돌아가셨다. 쇠약해진 면역체계가 겨울의 마지막 냉기를 이겨내지 못했다. 몇 달 전까지도 휠체어에 의존해 용인에서 상경해 프레스센터나 관훈클럽 언론세미나에 참석, 언론현장을 지키려던 의지만으로도 생동하는 봄날을 맞을 것 같았다. 책 욕심을 넘어 시대의 흐름을 찾으려고 열심히 찾아낸 외국서적을 다 읽을 시간은 주어야 했다.

유수 신문사의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거쳐 연합통신 사장 때 처음 뵈었다. 30년 전 서울올림픽 무렵이다. 원로 언론인의 기품이 그런 것인지 20년 후배의 언론출판을 격려하면서 사장실에 걸렸던 이만익 화백의 ‘아우래비접동’ 판화를 흔쾌히 선물했다. 황망했지만 이런 연분이 먼 핏줄의 울림이었던 것은 남원 향교에서 제를 지내는 시향(時享) 때 알았다. 집안 형님이셨다. ‘춘향전’의 작가로 설중환 교수가 연구한 할아버지 조경남(趙慶男)의 문집 ‘난중잡록’(亂中雜錄)의 국역판 출판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교정을 보며 우의를 쌓았다. 이 책은 육지에서 겪은 임진왜란의 기록으로 김훈의 ‘칼의 노래’에도 인용되었다.

간간이 풀어놓는 취재 비화는 그 시절 외로운 민주화 투쟁이자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한국언론사 교과서였다. 기록으로 남기자며 출판을 부추겼다. 이제 그의 책 ‘미군정하의 한국정치현장’ ‘저널리즘과 권력’ ‘대통령의 무혈혁명’은 정치부 기자의 열정과 땀이 밴 기자정신의 실천으로 역사가 되었다. 언론계의 오랜 동무였던 김동익 전 중앙일보 사장의 회고처럼 그는 학력사회의 허망하기 그지없는 두꺼운 유리천장을 실력 하나로 뚫고 기자의 길을 늠름하게 걸은 몇 안 되는 거인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하늘나라에도 봄날은 휘청거리는지요? 선생의 유머에 감싸인 독설이 벌써 그립습니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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