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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형의 화양연화] 디지털 시대, 내 여행 사수하기

입력
2016.06.1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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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땀 한 땀 모은 월급의 결정체’. 한 샐러리맨은 여행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덕분에 유월이 되면 내 핸드폰은 최대 성수기를 맞이하곤 했다. “주말 붙여서 9일 정도 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드리아 해의 코발트블루 바다에 빠지고 싶기도 하고 가까운 해변에 가서 푹 쉬다 오고 싶기도 해. 어디가 좋을까?” 친구의 마음 상태와 휴가 일수를 감안해 몇 가지 코스를 제안하는 것이 이맘때 흔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휴대폰이 우는 수가 줄었다. 궁금해서 먼저 전화를 걸어봤다. “올해는 안 물어봐”라고. 친구의 답은 의외였다. 저가항공 이벤트로 세부행 티켓을 10만원 대에 ‘겟’해서, 여행지를 선택할 필요가 없어졌단다.

주말에 결혼하는 후배 부부도 비슷했다. 허니문은 꿈의 여행. 행선지를 물으니 제주도라고 답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허니문 목적지로 제주를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짧았다. 특가 항공권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둘이 제주도 왕복하는데 6만원 남짓밖에 들지 않더라고 했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는 여행은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이보다 더 행복한 고민이 있던가. 상상만으로 우리는 세계 곳곳을 날아다녔다. 그러나 요즘은 달라졌다. 내가 가고 싶은 곳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곳에 따라 여행지가 정해졌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하는 결혼이 아니라 조건에 맞는 사람을 만나 적당히 만족하며 하는 결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정보통신(IT)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다. 여행이 받은 디지털 수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아도, 누구나 휴대폰에서 쉽게 저렴한 항공권을 산다. 무거운 가이드북 대신 이북을 챙기고 종이지도 대신 구글맵을 깐다.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해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리뷰를 훑고, 부킹닷컴이나 트리바고 같은 숙박검색 사이트를 이용해 숙소를 예약한다.

여행과 디지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몇 달 전 기차를 타고 스위스를 여행할 때였다. 스위스 시계만큼이나 정확한 스위스연방철도(SBB) 앱 덕분에 한 번도 기차를 놓치지 않았다. 효자가 따로 없었다. 중국여행 때도 마찬가지였다. ‘니하오’ 수준의 실력으로, 시내버스만 타고 다녔다면 믿을 수 있으려나. 중국 지도 앱인 ‘바이두 맵’이 아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의 4대 정원 중 하나인 쑤저우(蘇州)의 졸정원 앞에서였다. 그곳을 향하는 여행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바이두맵 앱을 보고 있었다. 우리의 길잡이는 지도도 현지인도 바람도 아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예전에는 지도를 들고 다니며 길을 찾으러 현지인들에게 길을 묻곤 했는데, 바이두 덕분에 더 이상 어느 누구에도 말을 안 걸고 있다는 것을. 바이두가 고맙기도 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길을 묻다가 친구가 된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되면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테이블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요즘 게스트하우스 풍경은 달랐다. 스마트폰에 눈을 대고, 자신이 떠나온 곳과 접속하고 있었다. 회사에 있는 친구에게 여행지에 대해 실황중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왜 자신에게는 현지인 친구가 생기지 않는지, 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문득 왜 여행을 떠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고 새로운 것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던가.

오해는 마시라. 디지털을 외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앞으로 여행할 때 더 많은 앱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편리함에 빠져 여행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한 가지 마음을 먹었다. 여행지의 냄새와 바람, 흙먼지를 담아 지인들에게 엽서를 보내기로. 잉크가 번지고 알아볼 수 없는 글씨지만, 내가 보낸 엽서를 소중히 간직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일모레 떠나는 뉴올리언즈 여행에서는 카카오톡을 여는 대신 흐느적거리는 재즈를 담아 엽서를 띄워야겠다.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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