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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서울특별시립과학관장

등록 : 2016.06.14 14:27
수정 : 2016.06.14 16:47

[이정모 칼럼] 英 첼트넘에선 과학도 축제가 된다

등록 : 2016.06.14 14:27
수정 : 2016.06.14 16:47

지난 토요일 저녁 8시 영국 첼트넘의 공원 임페리얼 가든에 세워진 대형천막 안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유럽 최대 축구 이벤트인 유로 2016 본선에 진출한 잉글랜드의 첫 경기가 열리는 시간이다. 18세 이상의 성인 수백명이 숨을 죽인 채 무대 위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킥오프가 아니었다. 수학자 마트 파커가 등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이어서 8분여에 걸쳐 마트 파커의 원맨쇼가 펼쳐진다. 나는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학 스탠딩 코미디를 경험했다. 자신의 쇼를 마친 마틴 파커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을 무대에 세웠고 이들은 과학쇼를 보여주었다. 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천막을 빠져나온 청중들은 이제야 잉글랜드와 러시아의 경기가 1대 1로 끝났다는 사실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한다.

첼트넘은 런던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인구 12만의 작은 도시다. 첼트넘에서는 매년 세 차례 페스티벌이 열린다. 4월의 재즈 페스티벌, 6월의 과학 페스티벌 그리고 10월의 문학 페스티벌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과학 페스티벌은 영국문화원이 주관한다. 그리고 전 세계의 젊은 과학자들을 이곳에 초대한다. 나도 영국문화원의 초대로 젊은 과학도 두 명과 함께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과학 문화를 확산하는 노력을 하고 있거든. 이것 봐. 참 잘하지. 너희도 한 번 이렇게 해 보면 좋지 않을까. 과학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야.” 영국문화원의 그 어떤 사람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법이다. “와, 영국문화원이 전 세계의 과학자들을 초대하는 것을 보면 정말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페스티벌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행사장이 저 멀리 보일 때부터 착오라는 게 드러났다. 첫날에는 커다란 천막 일곱 개와 작은 천막이 여섯 개가 전부였다. 물론 타운홀에 커다란 전시장과 강연장이 있었고 인근의 여자고등학교의 멋진 강당이 강연장으로 제공되었다.

모든 행사에는 의전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개막식에 참여해서 높은 사람들의 지루한 연설을 듣고 뜬금없는 비보이 공연을 관람할 마음의 준비쯤은 하고 갔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정말이다. 개막식, 폐막식, 연설 따위는 없었다.

천막은 정확히 아침 9시에 열렸고, 사람들은 다짜고짜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과학자들과 만났다. 해설사, 아르바이트생, 고등학교 과학동아리 학생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관람객을 맞았다. 그들에게는 마이크가 없었다. 맨 목소리가 전달되는 대여섯 명의 관람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학적 원리가 설명된 패널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관람객들은 책에도 나오는 내용을 읽으러 온 게 아니라 과학자들과 만나러 온 곳 같았다. 이야기가 끝난 후 같이 사진 찍자는 사람도 없다. 자기 이야기가 끝나면 얼른 다음 사람에게 과학자를 넘겨 주었다.

과학 페스티벌은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단체로 온 초ㆍ중ㆍ고 학생을 위한 시간이다. 학생들은 버스를 타고 왔지만 이들을 위해 공원 옆에 버스를 세우게 하는 편의제공 같은 것은 없었다. 학생들과 교사는 두 블록쯤 떨어진 곳에 내려서 걸어왔다. 하긴 두 블록 정도 걸으면 어떤가. 초등학생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인솔 교사를 졸졸 따라다녔고 중학생들은 미션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페스티벌을 즐겼으며 고등학생들은 과학자들과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진로를 과학자들과 상담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오후 2시가 되면 그 많던 아이들은 싹 사라졌다.

이제 성인들의 시간이다.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인구 12만의 작은 도시에 이렇게 많은 노인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강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거의가 60대 이상의 노인이었다. 40, 50대는 소수였으며 20, 30대는 더 적었다.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의 입장료는 우리 돈으로 1만원에서 2만5,000원 정도다. 이런 강연과 워크숍이 일주일 동안 약 130개 정도 열렸다. 좁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의자에 한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고역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보고 싶던 과학자들을 코앞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리처드 도킨스도 한 짝은 빨간색 다른 짝은 하늘색 양말을 신고 무대에 섰다. 나는 해부학자 앨리스 로버츠를 세 번이나 만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정작 좋은 정보는 아직 유명세를 타지 못한 젊은 과학자들에게서 얻었다.

강연이 끝난 후 강사는 다른 천막에 마련된 서점으로 옮겨가서 사인회를 했다. 사진을 같이 찍고 싶으면 사인회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만 그런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했으며 그 시간에 맥주를 즐겼다.

주말이 되자 페스티벌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시간을 내서 찾아온 20~40대 관람객들이 중심이 되었다. 관람객 층이 다르면 프로그램도 달라진다. 과학자들이 아주 단순한 것들을 설명하고 아이들은 아주 단순한 체험을 하면서 행복해했다. 그들은 불평하는 대신 감사를 표했다. 행사를 진행하는 주최 측 사람들 누구도 민원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페스티벌을 스스로 즐겼다.

내가 이번 체트넘 페스티벌에서 감명받은 것은 전시나 강연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규모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울 과학 페스티벌이 아니라 노원 과학 페스티벌 또는 하계 과학 페스티벌 같은 동네 축제인 것 같다.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과학자들도 즐거워야 한다. 우리도 이제 개막식 따위는 집어치우자.

서울특별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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