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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귀마개 채용이 먼저다

입력
2017.08.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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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에게 들은 얘기다. 아무개는 딸이 금융회사 최종 면접을 앞뒀다. 한 명만 제치면 오랜 고생 끝 행복 시작. 이기심을 맘껏 발산해도 책잡히지 않을 시점에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둘 중 자리에 합당한 자를 뽑아주세요. 딸보다 상대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에게 기회를 주소서.” 중년에 접어들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감행한 작은 실천이었다.

기도가 통한 걸까, 합격자 발표 당일 기다리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딸을 위한 진정이라 여겼건만, 사욕을 누르고 낯선 공의(公義)를 품었건만 좌절하는 딸에게 그는 면목이 없었다. 대개 그렇듯 ‘내 딸이 뽑히게 해달라’ 간구했다면 결과야 어찌 됐든 마음이나마 덜 불편했을 것을.

얼마 뒤 언론사 간부가 삼성 고위 임원에게 보냈다는 아들 취업 청탁 문자메시지를 봤다. 낯 뜨겁고 부끄럽다. 아들이 아니라 임원을 위해 ‘일들마다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길 기도 드리겠다’는 말미의 맹서는 차라리 안쓰럽다. “저런 거 폭로하려고 들면 난 무수히 많다”는 한 대기업 임원의 진지한 우스개는 두렵고 슬프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 발가벗는 부정(父情)은 부정(不正) 그 자체다.

거푸 접한 두 아비의 전혀 다른 기도는 양육관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양심에 터 잡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연대인가, 사회지도층이라 자부하며 끼리끼리 성취를 독식하는 담합인가. 어쩌면 후자가 우리의 웅크린 욕망을 에누리 없이 드러내고 있을 터. 인맥이란 리본, 융통성이란 포장 속에 꽁꽁 숨겨둔 반칙은 결국 제 자식, 남의 자식 가릴 것 없이 오염시킨다.

취업 청탁은 제 자식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자 범죄다. 충분히 합격할 능력을 갖췄음에도 혹여 애걸했다면 모욕이고, 오로지 청탁 덕에 뽑혔다면 악업을 선물한 꼴이다. 그로 인해 기회를 빼앗긴 누군가는 심리적 절도 피해자가 된다. 피해는 개인을 넘어 한 집안, 온 사회로 퍼져 나간다. “세상은 여전히 불공정하다”는 외침은 빈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녀 취업 특혜 의혹은 인사청문회의 단골 메뉴로 안착 중이고, 공기업 감사나 잇단 폭로를 통해 잊을만하면(일일이 호명하진 않겠다) 터져 나온다. 당사자 둘만 입을 다물면 그만인 은밀한 범행이 시시때때로 드러나는 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고로 “내 아이는 절대 특혜가 아니다”는 해명이 왜 안 먹히냐는 불만은 애먼 세상이 아니라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여기는 기득권층을 향하는 게 옳다.

청년실업 120만 시대, 노력한 만큼 능력껏 보상받길 바라는 청춘의 앞길에 재를 뿌려서는 안 된다. 자식을 가진 기성세대가 도매금으로 매도 당해서도 안 된다. 연대의 끈을 붙잡고 있는 참 부모도 많으므로.

마침 블라인드(눈가리개) 채용이 뜨고 있다. 학력 지역 연줄은 물론 외모도 보지 않고 오직 업무 관련 경험과 실력만으로 뽑겠다는 것인데, 취업 청탁을 원천 봉쇄하는 ‘귀마개’ 채용부터 도입했으면 한다. 애써 공부한 이들의 역차별 아우성, 난감하다는 기업 등 의견이 분분한 눈가리개 채용과 달리 귀마개 채용은 하등 거리낄 게 없다. 취업 청탁 신고 의무화, 취업기회 제한 등 방법은 정하기 나름이다.

아침마다 초등 4학년 아들 머리에 손을 얹고 소리 내 세 가지를 기도한다. “친구들과 신나고 안전하게 놀게 해주세요. 먼저 양보하고 짜증내지 않게 해주세요. 수업시간에 딴짓하지 않게 해주세요.” 등교시간에 쫓겨 깜빡 하는 날엔 아이가 먼저 “아빠 기도” 하고 청한다. 취업할 날은 멀었지만 기도 하나를 추가하련다. “뿌린 대로 거두게 해주세요.”

서두에 등장한 아무개 딸은 합격자 발표 예정일이 하루 지나 전화를 받았다. “OO사입니다. 죄송합니다. 연락이 늦었습니다. 최종 면접에 오른 두 분 모두 출중해 장고했습니다. 둘 모두 합격시키기로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언론사 간부 아들의 합격 여부는 모르겠다.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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