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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전바오다오 분쟁 (3.2)

입력
2018.03.02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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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 2일 전바오다오 분쟁 초기 상황. 중국ㆍ소련 분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dvhab.ru
1969년 3월 2일 전바오다오 분쟁 초기 상황. 중국ㆍ소련 분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dvhab.ru

1969년 3월 2일 중국과 소련 국경지대인 중국 헤이룽장 성 우수리강 중류의 섬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양국 군대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주먹질에 몽둥이가 등장하고, 열흘쯤 뒤부턴 장갑차와 대전차포가 동원된 무력분쟁으로 비화했다. 알려진 바 양국 수뇌부는 핵을 포함한 전면전까지 염두에 두었고, 중국은 전시 수도를 충칭(重慶)으로 이전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전바오다오 분쟁(혹은 사건)으로 불리는 그 충돌은 공산주의 이념 정통성과 헤게모니를 두고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양국의 힘겨루기가 처음 가시화한 사건이었다.

중국이 소련 패권을 경계하기 시작한 건 1950년대 말부터였다. 헝가리 체코 등 동구 국가들의 반소비에트 봉기의 무력 진압과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및 동서 공존노선, 브레즈네프의 사회주의권 분쟁 개입 독트린 등 일련의 정세는 공산권 응집 및 서방 적대노선을 고수한 마오 체제의 중국에게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혁명 후 소련의 군사ㆍ과학ㆍ교육 원조에 기대며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으로 누그러뜨려온 러시아에 대한 사적ㆍ민족적 감정도 되살아났다. 청말 아편전쟁 등으로 중국은 러시아에 각각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남부(우수리스크)와 헤이룽장(黑龍江) 이북 영토를 빼앗긴 터였다.

전바오다오는 우수리강을 따라 새로 그어진 국경선이 지나는, 0.74㎢의 작은 하중도로, 양국은 중대 규모의 군대를 두고 별 긴장 없이 대치하던 곳이었다. 마침 홍수로 물이 불어나 국경이 흐려지면서 시작된 장난 같은 신경전은 양국 군대의 자존심과 이념ㆍ지리적 패권 대립으로 확산됐다. 보름간 이어진 분쟁으로 소련 군인은 59명, 중국은 100여 명이 숨졌다. 당시만 해도 전력 면에서 압도적이던 소련은 전면전을 추진했으나 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소비에트 군사력의 유럽 집중을 경계한 미국의 외교적 개입으로 확전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직후인 70년대 초 미중 관계 개선이 본격화했다.

중소 양측은 69년 9월의 양국 총리 회담으로 분쟁을 끝냈고, 87년 국경 협상을 시작해 2005년 매듭지었다. 진바오다오가 중국 영토로 확정된 건 1991년 5월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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