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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하수인 마태, 예수 만나 '인생 반전'

입력
2018.03.03 10: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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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1993년 작품 '프랙탈 거북선(Fractal Thurtleship)'. 버려진 전자기기를 사용해 만든 예술작품이다.
백남준의 1993년 작품 '프랙탈 거북선(Fractal Thurtleship)'. 버려진 전자기기를 사용해 만든 예술작품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성서의 ‘쓰레기’에 대해 글을 썼던 이는 없었던 것 같았다. 성경의 심오한 신학적 주제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은 많았지만, 쓰레기는 없었으리라. 그런데 아뿔싸. 없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쓰기로 하고 막상 연구를 해보니, 성서시대에는 쓰레기가 거의 없었다.

고대 사회이다 보니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들은 대부분 천연재료로 만든 것들이었다. 지금의 산업시대처럼 급증하는 폐기물이나 그 처리에 대해 고민했던 사회가 아니었다. 예언자 아모스가 당시 사회의 구석구석을 골고루 꼬집어 비판했지만, 환경문제를 가지고 목소리를 높인 적은 없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쓰레기를 성경이 증언하는 바가 있다. 예루살렘과 같은 중앙도시에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물이나 쓰레기를 처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똥문’이라는 곳이 남아있다. 영어로도 ‘Dung Gate’라 불리는 곳이다. 구약성경 느헤미야서도 자주 언급하고 있는 매우 유서(?)깊은 곳이다.(2:13 등) 우리말 성경은 젊잖게 ‘분문(糞門)’으로 번역하거나 ‘거름 문’, ‘쓰레기 내는 문’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 이는 히브리어 ‘아쉬포트’라는 말 자체가 잿더미, 쓰레기더미 혹은 똥 더미 등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기원전 고대 예루살렘도 쓰레기를 처리할 곳이 필요했었음을 잘 알려준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인분과 생활 쓰레기들을 집결하여 태웠던 곳으로 추측된다.

이스라엘의 ‘똥문’

쓰레기를 묵상(?)하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영국 유학시절 볼 수 있었던 ‘프리건(freegan)’이라는 친구들인데, 이들은 대형마트 같은 곳에서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버려지는 식료품을 수거해다가 집에서 음식을 해먹던 친구들이었다. 유통기한을 막 10분 정도 지난 재료가 급격히 변질되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가져다 먹어도 별 탈은 없었다. 주로 젊은 대학생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이 꼭 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과장된 소비 행태와 과대 낭비로 인한 환경문제, 이로 인한 빈곤층의 상대적 소외감을 꼬집는 저항운동이기도 했다. 프리건들은 버려진 쓰레기의 운명을 뜻 깊게 뒤바꾸어 놓았다.

나는 어린 자녀들도 있던 터라 그들의 식생활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도 부자 동네 어귀에 버려져 있는 멀쩡한 가구를 우연찮게 발견하면, 얼른 가져다가 잘 사용하곤 했다. 유학생들은 처지가 다들 비슷했기에 별 부끄럼 없이 다들 그렇게 살았다. 넉넉한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였지만 쪼들린 유학생에게는 멋진 빈티지 가구였다.

마침 시편은 누군가의 쓰레기로 살아가는 가난한 자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티끌 가운데서 일으키시며 굶주린 자들을 쓰레기장(아쉬포트)에서 들어 올려 자기 백성의 귀족들과 함께 앉히신다.”(113:7-8; 현대인의 성경) 누군가가 먹다 버린 음식 쓰레기가 굶주린 사람들에겐 식량이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경제적 간극이 가슴 시리게 잘 표현되어 있다.

생각해보니 쓰레기는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용하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만 사용하기를 중지하는 순간, 그것은 곧 쓰레기가 된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쓰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는 것이고, 닳고 헤진 물건도 누군가 쓰기만 하면 유용한 제품이 되는 것이다. 쓰임 받는지 여부가 그 큰 운명을 결정해 버린다. 이렇게 쓰레기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한국이 낳은 위대한 전위예술가 백남준의 작품들이 더 의의가 있어 보인다. 남들이 버린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그에게는 가장 유용한 소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버려질 ‘쓰레기’들을 다시 한 번 무대 위로 가지고 올라가 실컷 재사용하고 관객 앞에서 부수거나 태우기도 했었다.

1993년에 만든 ‘프랙탈 거북선(Fractal Thurtleship)’이라는 작품도 보시라. 버려진 TV들을 쌓아 놓은 것 같은데,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훌륭한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다. 쓰레기로 사라질 뻔 했던 것들이, 이제는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 영원히 관리 보관될 최고의 작품이 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쓰레기는 결코 쓰레기가 아니다. 다시 쓰임받을 수만 있다면,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고귀한 예술품으로 새 삶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국민 쓰레기’ 마태

실제 쓰레기는 아니어도 우리는 이 단어를 문학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도 쓰레기가 있다. ‘이 쓰레기 같은 놈아’처럼 말이다. ‘밉상’ 정도면 애교 섞인 표현으로 보겠지만, ‘쓰레기’란 말은 많이 강하다. 성경도 이처럼 ‘쓰레기’라는 말을 문학적으로 사용한 용례는 없었을까? 당시에도 분명 그런 말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본문이 전수되어 오면서, 그 말이 지닌 부정적이고 무례한 어감 때문에 보수적인 서기관들이 삭제하거나 완곡하게 표현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무언가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려고 할 때면, ‘쓰레기’같은 강한 표현보다는 ‘어둠’이나 ‘흑암’같은 점잖은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이사야 9:1-2)

예수님이 살던 시대 이스라엘에도 소위 ‘국민 쓰레기’가 있었다. 이 지면을 통해 자주 언급했던 ‘세관장’ 혹은 ‘세리’라는 자들이다. 자국민의 돈을 무자비하게 거두어 통치국에 가져다 바치던 매국노들이었다. 그런데 그 ‘쓰레기’ 중 하나가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국민 쓰레기’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을 돌이켜, 신약성경의 첫 책인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쓰레기가 백남준을 만나 영감어린 예술품이 된 격이다. 마태는 인류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의 공동저자가 되었으니, ‘누구에게 쓰임 받느냐’가 이렇게 중요하다. 로마 제국의 하수인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일어난 인생반전이었다.

헨드릭 테르부르그헨의 1616년작 '부름받는 마태'. 모두가 미워하는 세리였던 마태는 예수님에게 쓰임을 받으면서 복음서 저자가 됐다.
헨드릭 테르부르그헨의 1616년작 '부름받는 마태'. 모두가 미워하는 세리였던 마태는 예수님에게 쓰임을 받으면서 복음서 저자가 됐다.

‘쓰레기’라는 말에 더더욱 마음이 씁쓸해질 어느 누군가가 있을지 모르겠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쓰레기처럼 여길 수도 있으리라. 심지어 가족과 친구들도 자신을 쓰레기로 여기는 듯하여 어둠의 그림자가 영혼에 무겁게 드리워 있을 수도.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처음부터 쓰레기였던 것은 이 우주에 아무것도 없다. 쓰레기라 하더라도 절망은 있을 수 없다. 모두 다 돌이킬 수 있다. 다시 사용된다면, 올바르게 쓰임 받는다면 새롭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절박한 배고픔을 채울 수도, 예술가의 손에 들려 명작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값진 인생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쓰레기여도 당신은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 절대 내일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란다. 흔한 말을 빌리자면, 당신의 내일은 누군가의 절박한 단 하루일 수도 있다. 생명만큼은 한번 버리면 영원한 쓰레기가 된다. 돌이킬 수가 없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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