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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람들은 살아가고 일상을 버텨낸다

입력
2016.11.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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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무시로 범법과 부정을 자행하고 국가의 자원이 그 수단으로 동원되어온 기막힌 상황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세월호의 생명들조차 한갓 추악한 정치 공학의 대상이었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참담한 시절이다. 다만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운 이들의 얼굴이 마냥 어둡기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처참하게 망가지고 짓밟힌 정의와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의지와 활력을 서로에게서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분노의 목소리 한편으로 밝게 안부를 묻는 모습은 지금 이 참담한 시절의 또 다른 삶의 국면일 테다. 사람들은 살아가고 일상을 버텨낸다.

‘기억의 작가’로 불리는 조르조 바사니(1916∼2000)는 이탈리아 북부의 소도시 페라라를 무대로 한 일련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유대인으로 바사니가 페라라에서 보낸 성장기는 파시스트 세력의 발흥과 겹친다. 파시즘과 전쟁의 광풍이 시시각각 덮쳐오는 암울한 시대의 분위기를 섬세하게 돋을 새기는 가운데 작가는 페라라의 거리와 광장, 성벽과 들판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을 되찾아오는 기억의 행로를 연다. 담장의 쐐기 하나,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페라라의 6월의 하늘까지 되살려놓은 묘사의 놀라운 생생함은 바로 그 때문에 그것들이 이미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너무도 쓰라리게 증언한다. 그의 기억의 언어는 온통 사라지고 상실되고 죽어간 것들에 바치는 애가(哀歌)다. 가령 작가의 대표작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현경 옮김, 문학동네)에서 수만 평의 정원을 가진 대저택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던 유대계 귀족 핀치콘티니가의 사람들을 포함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주인공의 회상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미 세상에 없다. 핀치콘티니 가문이 마련해놓은 위풍당당한 가족묘가 있었지만 병사한 큰아들만이 그곳에 묻혔을 뿐이다. “반면 그의 여동생 미콜, 아버지 에르만노 교수와 어머니 올가 부인, 고령에 중풍을 앓던 올가 부인의 어머니인 레지나 부인 모두는 1943년 가을에 독일로 강제 이송되어, 그들의 무덤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아는 이가 없다.”

인종법이 통과된 직후이자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유월절 만찬 풍경은 또 어떠했는가. 대학 졸업반의 주인공 ‘나’는 그날의 식탁을 “절망적이고 기괴한 유령들의 모임”으로 기억한다. “삼촌과 숙모들, 사촌들을 차례로 보았다. 그들 대부분을 몇 년 뒤 독일 화장장의 소각로가 집어 삼켜버렸다.” 실제에서도 그러하지만 소설이 회상의 불꽃으로 타오를 때 다른 한쪽에서 쌓여가는 것은 유령의 시간이며, 그 시간의 재(灰)다. 그렇게 해서 종종 소설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가 되기도 한다.

아니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도 화사하고 빛나고 가슴 설렌다. 여기에는 핀치콘티니가의 소녀 미콜이 일컬은 ‘철없는 사랑의 푸르른 낙원’이 있다. 열두 살 소년 시절 ‘나’는 핀치콘티니가의 ‘신성한 담장’에서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은 뜨거운 하늘 아래 미콜을 만났거니와, 10년을 격해 점화된 둘의 사랑은 쓰라린 상처와 환멸만 남겼을지언정 아름답다. 다만 아들의 상심을 아는 아버지는 말한다. “다 지나갈 거다. 다 지나갈 거야.” 그러면서 늙어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의 쓸쓸함과 무력감에 대해 토로한다. “우리 세대는 너무나 큰 실수들을 많이 했다. 어쨌든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넌 이렇게 젊으니!” 이것은 지혜의 전수일까, 다가올 끔찍한 불행을 직감하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간절한 호소였을까. 에트루리아인의 묘지에서 한 꼬마가 일깨워주었듯, 까마득히 먼 과거의 사람들도 언젠가 산 적이 있다. 이 사실은 이상하게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반파시스트 투쟁을 하다 투옥되기도 했던 작가도, 소설의 주인공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은 아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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