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호의 실크로드 천일야화] <45> 간디가 화장된 ‘라즈가트’
최근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해 연세대에서 열린 간디 흉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인도 총리가 비폭력 무저항으로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간디가 화장된 ‘라즈가트’는 인도 수도 델리 남쪽 야무나 강변에 있었다. 국립현충원 격인 이곳에는 외국의 여행객 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의 참배 행렬도 꼬리를 물고 있었다. 야외인데도 사원을 들어가듯 신발과 양말을 벗도록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이곳을 국빈방문할 때도 슬리퍼는 신었지만 맨발을 피할 수는 없었다. 횃불이 꺼지지 않는 검은 대리석에는 간디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오 신이시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간디가 우리에게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그의 비폭력 무저항주의가 우리 3ᆞ1운동과 많이 닮아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사진 한 장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는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은 물론 전세계의 영적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인물이 간디 못지 않은 위상을 떨치고 있었다. 그것도 간디와 동시대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암베드카르다. 카스트에서 가장 낮은 불가촉천민이었던 그는 미국 콜롬비아대와 런던정경대에서 석ᆞ박사 학위를 받고 인도 헌법을 만든 정치인이자 법학자였으며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간디와는 정치적 앙숙이었다. 결정적인 차이는 카스트에 대한 생각이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신의 자녀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분노했지만 결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스트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힌두교를 옹호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불가촉천민인 암베드카르는 카스트제도 폐지를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 간디와 대척점에 서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사건은 1932년 발생했다. 당시 식민통치자였던 영국이 암베드카르의 요구대로 불가촉천민을 위한 분리선거구 제도를 도입키로 했다. 일반인과 불가촉천민이 같이 투표할 경우 불가촉천민이 당선될 가능성도 희박하고 의회의 대표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영국이 수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간디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힌두사회에서 불가촉천민을 분리시키면 힌두의 단일성이 깨진다는 위기감 때문에 분리선거구 도입에 반대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 것이다. 목숨을 건 단식에 결국 암베드카르가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암베드카르가 보기에 간디는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허울좋은 개혁가에 불과했다.
1947년 인도 독립 후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충돌했다. 간디는 마을 단위 의사결정체인 ‘판차야트’를 정치와 통치의 기본단위로 규정했으나 결국 ‘개인’을 상정한 암베드카르의 뜻이 관철됐다. 판차야트 단위로 자치권을 행사하면 불가촉천민에 대한 억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헌법에도 불가촉천민의 사회진출에 대한 할당제를 관철시켰다. 암베드카르는 수천 년 힌두 사회에서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면서 인도의 민주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는 결국 힌두와 결별했다. 암베드카르는 1956년 “나는 힌두로 태어났지만 힌두로 죽지 않을 것”이라며 불교도로 개종했다. 당시 개종식 후 50만명의 불가촉천민이 그를 따라 불교도가 되었다.
암베드카르는 불교도가 된 지 2개월도 되지 않아 자택에서 숨을 거뒀고, 간디는 그보다 8년 전인 1948년 카스트의 화합을 호소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힌두교도에게 암살당했다.
인도현대사에서 간디는 숨졌지만 간디라는 이름은 아직도 건재하다. 물론 전혀 다른 간디다. 이 간디 집안을 거론하면 북한의 김씨 집안이 패키지로 떠오른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는 자와할랄 네루다. 그의 외동딸 인디라 간디, 그녀의 장남 라지브 간디가 3대에 걸쳐 총리를 지냈다. 이제는 라지브의 아들인 라훌 간디가 4대째 총리를 바라보고 있다.
네루 수상은 인도가 독립한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인디라 간디의 어릴적 이름은 인디라 프리야다시니 네루였지만 페로세 간디와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르게 됐다. 페로세 간디와 마하트마 간디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함수관계도 없다.
인디라 간디는 1966년 총리직에 올라 1977년까지, 1980년부터 1984년까지 16년간 총리를 지내면서 인도 최강의 여신 ‘두르가’로 비유될 만큼 과단성 있는 정치력을 보였다. 그는 1984년 6월 인도 북서부 파키스탄과 인접한 암리차르에서 시크교도 최고 성지인 황금사원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시크교도들을 탱크와 총칼로 진압한 까닭에 같은 해 시월의 마지막날 시크교도 경호원 2명에 의해 살해됐다.
그날 저녁 인디라의 장남 라지브가 취임 선서를 한 후 총리직에 올랐다. 라지브는 1991년 타밀나두에서 총선거 지원유세를 갔다 스리랑카 반군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 소속 여성의 폭탄테러로 숨졌다. 스리랑카의 안정을 추구하며 반군 투쟁 노선을 반대한 것이 이유였다.
라지브의 아내 소냐는 은둔형이었지만 남편 사망 후 어쩔 수 없이 정치판으로 나오게 된다.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한 소냐는 총리직을 권유하는 국민들에게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된다. “여러분은 만장일치로 저를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권력 자체는 단 한 번도 저를 유혹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신념을 이해하고 받아주길 요청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원칙과 비전, 이상을 위해 싸워나갈 것입니다.” 부부 총리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라훌 간디는 어머니 소냐의 후원과 자신의 정치력으로 총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힌두 카스트 계급에서 최상위인 브라만 혈통이었던 네루-간디 집안의 배우자 선택을 보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인디라가 결혼한 페로세 간디는 배화교, 즉 조로아스트교 신자였다. 라지브 간디가 선택한 소냐는 가톨릭신자였고, 라지브의 동생 산자이의 아내 마네카는 시크교도였다. 힌두 뿌리가 깊은 이 집안의 가풍이 근대적이고 개방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글ㆍ사진=전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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