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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국정원장, 검찰총장이 거기 왜 있나

입력
2017.10.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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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미국 러스트벨트 지역의 중하층 백인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한다. 레드넥, 힐빌리로 불리는 이들은 끈끈한 가족애로도 유명하다. 가족 명예를 건드리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는다는 무언의 규칙이 있으며, ‘엄마 욕’ 같은 모독을 당하고 보복하지 않으면 체면에 먹칠하는 걸로 간주된다. 러스트벨트 빈곤층 가정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 ‘힐빌리의 노래’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문화권이나 명예에 대한 모독은 일종의 금기나 다름없고, 경우에 따라 명예살인 같은 피의 보복을 부른다.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정치개입 진상을 밝히기 위해 확정한 14개 조사항목 중에 ‘논두렁 시계사건’은 비극적 선택을 한 전직 대통령의 명예 문제라 경위나 그 결과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수사 중단에 따라 명쾌하지 않으나 윤곽은 나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이 재임 당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았으며 그 중 하나가 회갑 선물로 건네진 스위스제 명품시계다. 명품시계가 수사선상에 오른 사실이 언론에 유출되면서 권양숙 여사가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노 전 대통령 측 인사들은 당시 이를 두고 망신주기라고 반발했고 노 전 대통령은 이 보도 열흘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정권의 ‘손 볼 대상’이 된 계기가 뭔지 모를 일이나, 문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사태로 노 전 대통령이나 참여정부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증오심이 그때부터 시작됐고, 정치보복 시작은 참여정부 인사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는 내용을 회고록에 썼다.

2009년 대검 중수부장으로 노 전 대통령 수사를 맡았던 이인규 변호사는 6년 뒤 “노 전 대통령이 ‘시계 문제가 불거진 뒤 (권 여사가) 바깥에 버렸다고 한다’는 말을 했을 뿐 논두렁 얘기는 없었다”며 논두렁은 국정원 작품이라는 취지로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적폐청산 TF는 국정원이 이 사건에 개입, 여론조작을 했는지 살피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국정원 정치개입 등 이명박 정부 시절 과거사 들추기와 검찰수사가 이 전 대통령을 겨냥하면서 보수야당은 정치보복으로, 여당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며 맞서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여야 4당 대표와의 청와대 회동에서 “의도적으로 보일 경우 정치 보복이란 악순환이 초래된다”는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 말에 “전 정권에 대한 기획사정은 안 된다. 정치보복은 단호히 반대한다”고 했다.

대통령 의지가 무엇이든 논두렁 시계는 물론 국정원 대선개입 조사를 포함해 이해당사자 성격이 묻어 있는 적폐청산 드라이브는 보복 시비를 피해갈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개입된 국정농단 사건과 달리 보수야당의 격한 반발을 부르는 것도 다분히 그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퇴행적 시도”라며 맞섰고, 측근 인사였던 이재오 늘푸른한국당 대표는 “권력이 곧 정의인 듯 설쳐 댄다”고 비난했다.

시비가 어떠하든 정권 이익을 목적으로 이뤄진 정보기관 여론조작과 선거개입은 민주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국기문란 범죄다. 다만 적폐청산 처리과정이 공명정대하게, 정치 중립적으로 이뤄지느냐가 문제다.

여론조성을 노린 여권의 문건 폭로는 차치하더라도 노무현 정부 정책을 이어받은 이 정부의 반부패 정책협의회는 무신경 내지 독선을 드러낸다. 지난달 26일 문 대통령 주재로 사정기관을 포함해 15개 기관장이 참석한 반부패 정책협의회에서 문무일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이 보고한 내용이 충실히 이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낄 자리인가”라고 에둘러 말하는 듯하다. 국정원 직원이 부패 정보를 얻기 위해 쑤시고 다니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국정원장이 낄 이유는 뭔지 궁금하다. 청와대는 정치 중립 훼손 논란에 반부패에 적용될 문제는 아니라는 취지로 일축했다. 야당 시절 두 기관의 정치성을 그토록 문제 삼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편의에 기대면 곤란하다. 하물며 적폐청산 작업의 중심에 있는데 말이다.

정진황 사회부장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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