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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논설고문

등록 : 2017.07.24 17:55
수정 : 2017.07.24 18:37

[이계성 칼럼] 문재인 속도

등록 : 2017.07.24 17:55
수정 : 2017.07.24 18:37

YS 전광석화 개혁 연상시키는 문 대통령

핵심 현안 속도로 밀어붙이는 데는 한계

야당 협치 이끌어 내는 노력 포기 말아야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추경 관련 시정연설을 마친 후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김영삼(YS) 대통령은 개혁 조치들을 숨가쁘게 쏟아 냈다.

취임 첫날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 개방이 신호탄이었다. 취임 사흘째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를 선언했다. 당시 김재순 전 국회의장, 박준규 의원 등을 포함한 정ㆍ관계 거물급 인사들의 줄사퇴와 정계 은퇴 회오리로 이어진 파동의 시작이었다. YS 당선 공신 중 한 사람이었던 김 전 의장이 이때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남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밀실ㆍ공작 정치의 상징인 궁정동 안가 철거, 군 사조직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도 취임 6개월 이내에 취해진 개혁 조치들이다. 국민은 열렬히 환호했고, YS 지지도는 80% 중반까지 치솟았다. 요즘 과속 논란이 일 정도로 개혁 조치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동향 정치선배이기도 한 YS에게서 영감을 받은 게 틀림 없다. 2015년 11월 YS 장례식에서 더불어민주당 전신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로서 한 추모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당신이 대통령 취임 첫해에 보여 준 단호하고 전광석화 같은 개혁 조치들은 참으로 눈부셨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는 용단들이었다”고 한 대목이다.

문 대통령 취임 후 단행된 개혁 조치들도 ‘단호하고 전광석화 같은’ 데가 있다. 취임 사흘째인 5월 12일 대통령으로서의 첫 외부행사로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 선언’을 시작으로, 5ㆍ18기념식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기, 4대강 사업 감사원 감사 지시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이런 과단성 있는 조치들이 격의 없는 소통 행보 등과 맞물려 유례 없는 취임 초 80%대 고공 지지율을 누리게 했다.

여기까지는 좌고우면하지 않는 단호함과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가 미덕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앞으로 풀어 가야 할 우리 사회의 산적한 난제들을 감안하면 지금까지는 오픈게임에 불과하다. 최근 국정기획위원회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를 선정하고 과제별로 그럴 듯한 해법도 제시했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면 쉬운 게 없다. 그동안은 대통령 업무지시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핵심 과제들을 풀어가기 위해선 지난한 사회적 합의와 조정을 거치고, 여소야대 국회의 높은 문턱도 넘어야 한다.

여기에는 속도 아닌 다른 덕목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1만원, 탈원전 드라이브는 벌써 과속 질주 논쟁에 휩싸여 있기도 하다. 최저임금 문제의 바탕에는 각 계층이 복잡하게 얽힌 우리 사회 분배 체계의 재조정이라는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탈원전 문제도 환경만이 아니라 미래 에너지 수요와 에너지 안보 등을 입체적으로 짜맞춰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기습적인 이사회라는 ‘속도’로만 접근해서는 풀기 어렵다. 인내심과 지혜를 더해야 한다.

여소야대 5당 국회는 국회의원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의 속도를 ‘0’으로 수렴시키는 특이한 곳이다. 이번 추경안과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도 국회의 그런 습성이 잘 드러났다. 지금 야당들은 대선 패배 후 위상 재정립과 내부 갈등 혼돈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추경안과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를 이끌어 낸 데 대해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나름 정치력을 발휘했다고 자평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년 6월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야당들을 협치로 이끌어 내기는 한층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은 문 대통령 대로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되는 개헌안 국민투표를 의식해 마음이 한층 급하다. 그 전에 주요 국정과제들을 밀어붙이고 싶을 것이다. 야당들이 협치에 응하지 않으면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국민과의 협치로 돌파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현재의 높은 지지율이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개혁 과속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미 지지율 하락세 조짐이 엿보이는 상황이기도 하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함께 가려는 노력이 답이다.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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